고난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

2009년 April 19일 ()

본문: 요한계시록 2:8-11 |

주 제: 고난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
본 문: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설교자: 조 성 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요한을 통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는 교회들과 그 교회들에 보낸 편지를 통해 좋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대상과 저자

서머나 교회가 생겨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사도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해져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8)” 주님은 자기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사 48:12)”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으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나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시며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눅 23:46, 마 27:46).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만족하게 받으시고 삼일 후에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편지의 내용

서머나 교회는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신의 고난을 감소시키기 위해 적당히 타협을 합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뇌물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름을 좀 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와 같은 것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실제로 당시 서머나 교회에는 황제 숭배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절해서 많은 목회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서머나 교회 역시 이와 같은 고통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29-30)”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궁핍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궁핍하게 산다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궁핍한 삶을 그냥 두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네 실상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빚에 허덕이면서 전기세도 못 내고 사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와서 “사실 당신은 부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궁핍이라는 말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 비해 풍족히 살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장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모르게 남루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그대로 두신 이유는 그들이 정말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볼 때 부자가 있고 하나님이 보실 때 부자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궁핍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절대 가난하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난한 듯하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이 부자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느 날 한 부자가 자신의 소출이 많아서 큰 창고를 짓고 그것들을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내가 너희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럼 네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자신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큰 부자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부를 보신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 있는 교회들은 대체적으로 신앙이 건강합니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아무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신앙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세속적이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도 둘 중 어떤 삶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물질적으로 궁핍한 삶을 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치고 죽을 때 재산을 쌓아놓고 간 자는 없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세계에서 얼마나 가진 자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 불 타 없어질 세상에서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한 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체면을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기죽기 싫은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물질적인 삶이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유대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교회를 훼방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에 누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떤 봉사를 하고 있는지, 누가 교회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지 교회의 걸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교회에는 항상 곡식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가라지가 있게 마련입니다(요 8:44).

주님의 명령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 환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또 환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우리로 주님을 부인하게 하고 범죄케 하기 위한 것이요, 주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또한 믿음을 더욱 성숙하게 하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각각 처한 곳에서 남들이 모르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통해 여러분을 세우기 원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귀한 교회였습니다. 환경적으로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였으며 감옥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책망하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당하는 환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에게 주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신 것입니다. 주님이 듣지 못하시는 기도는 없습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권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 이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체통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곳에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도, 감옥에 가서도 믿는 사람으로서의 체통을 지켰습니다. 훗날 총리가 되어 자기를 팔아 넘겼던 형제들을 만났을 때도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간증을 남겼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 있더라도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환경에서 주님의 이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이 굳건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떻든 믿는 자로서의 신앙을 지키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승리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이 땅에서 우리를 괴롭게 했던 모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환란 가운데 있는 것,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 장차 더 큰 환란가운데 있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너희는 부요한 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도 좋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하더라도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장차 우주의 은하를 하나씩 갖게 될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엄청난 부자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며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