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

2009년 October 11일 ()

본문: 고린도전서 15:1-11 |

주 제: 그리스도의 부활

 

본 문: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설교자: 조 성 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그 사건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2)”고 말하고 있고,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믿음 가운데서 부활을 빼버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나버리지 않습니까.

 

구원의 확실성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1-4)” 복음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한 장사한 바 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확인한 사실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5:11)” 이 사실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 하나만 가지고도 매일 춤을 추고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자들이 구원받고 다시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고 우리도 그들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복된 소식에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소식에 불과합니다. 부활은 우리 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미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5-6)”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례지낼 때 그가 다시 부활해서 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부활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잠자리 애벌레가 물속에서 살 때는 물 밖 세상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물 위로 올라와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지만 곧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을 부인했던 게바(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직접 만나 만져도 보고 식사도 하면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주님은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부활하기 전과는 다른, 일시에 오백 명에게 보이실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을 당시에도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활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의 진리를 내것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을 20평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고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을 100평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라면, 20평 아파트에서는 되도록 짧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육체를 벗어나면 하늘의 영광 가운데서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맨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가리켜 말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표현은 자신을 ‘덜 떨어진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드리신 속죄제물을 만족스럽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여러분과 저의 죄가 십자가에서 다 사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은 아버지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죄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셨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죄가 사해졌다는 의미이고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의 직분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9-10)” 제자들은 예수님 살아계실 때 서로 누가 제일 크냐를 가지고 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도 바울처럼 수고를 많이 한 사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맨 나중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수고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자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기 전의 자신을 모습을 생각하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전도하거나 자신이 교회에서 일해서 교회가 얼마나 부흥했는지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 역사하도록,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그것이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의심한 사람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실 때 그것을 믿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슬픈 기색을 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부활 후의 모습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으로는 은하계 하나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할까요. 이 말씀들은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늘나라를 돌아보고 온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아마 한 달 정도는 그 효과가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한 달이 지나면 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결론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열두 제자들,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쓰여졌을 당시 그 부활의 목격자가 200-300명이나 살아있었습니다. 새까맣게 모여든 개미들이 지렁이 한 마리를 가져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개미들이 안 되어서 지렁이를 집어 개미집으로 가져다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힘이 전혀 안 들었지만 개미들에게는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없었고 개미들 일생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을 체험한 개미들과 목격한 개미들이 그 사실을 기록했다면 어떨까요. 다른 개미들이 믿지 않는다면 목격한 개미들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사도 바울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목격한 개미들이 다 죽고 기록만 남게 되었다면 후대 개미들이 그것을 보고 “이것은 우화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역사는 우화가 아닌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