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시련

2005년 August 21일 ()

본문: 베드로전서 4:12-19 |

주 제: 그리스도인과 시련
본 문: 베드로전서 4장 12절~19절
설교자: 조 성 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과 시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시편 기자가,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남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많은 고난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고난이 없다고 하면 참 좋겠지만, 우리는 실제로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시련과 고난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시련과 고난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 때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짐승의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는 등 혹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먼저 시련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겠습니다.

시련(고난)의 종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시련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혹은 시련) 중에는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받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유익한 고난을 받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무익한 고난을 받고 살아갑니다. 첫 번째 시련의 종류는 본문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오는 시련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단련하기 위한 시련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오직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우리에게 더 순수하고 귀한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해 고난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치, 금을 단련하고, 은을 단련할 때, 그 뜨거움이 있지만, 그 뜨거움(고난)으로 인해 순수한 금과 은이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단련시키시는 이유는 순수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할 때, 늘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듭니다. 주님을 향한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태평한 삶을 누릴 때, 우리에게 점점 신앙의 군더더기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나쁜 것들이 우리의 신앙에 달라붙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순수한 마음을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게 만드는 시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때에 따라서 필요한 시련을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더 순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 중에는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해 오는 시련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시험해보기 위해 오는 시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 라고 말씀하시며 시험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시험해보신 것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을 때에, "내가 이제야 네가 네 아들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겠다." 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백성들을 다 몰아내시지 않고, 조금 남겨두신 이유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순종하나, 순종하지 않나를 보시기 위해 남겨두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한 시련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죄악 가운데 있을 때, 그 죄를 징계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와 함께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련을 통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이유 없이 우리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성경이 말하는 시련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시련에 대처하는 자세
본문 말씀에서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불시험이란 혹독한 고난과 시련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시의 성도들은 매우 혹독한 고난과 시련을 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변의 성도들이 여기 저기서 죽임을 당했고, 이것이 다른 성도들에게 굉장한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러한 환경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이상한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련이 올 때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만났을 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황하곤 합니다. 또 자기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닥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시련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옵니다. 시련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미국의 징 깁슨 형제님이 이제 은퇴하시고, 그 밑에 롼친이라는 중국계 장로님이 목회를 하고 계시는데, 롼친 장로님의 부인인 로린 자매님께서 암에 걸리게 되었다는 소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 자매님께 "당신은 암 중에서 가장 번식 속도가 빠른 암에 걸렸기 때문에 치료의 방법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멍하게 계시던 형제님 옆에 앉아 계시던 자매님은 평온한 얼굴로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나아야 된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죽으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매님의 반응을 보면서, 저는 자매님께서 마치 오랫동안 그것을 기다려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합니다. "하나님,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라는 반응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 말라." 기대하지 않은 일을 당한 것처럼, 내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반응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고, 사자밥이 되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는 "고난"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이 그다지 잘 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이라고 하면, 예배당이 집과 좀 먼 것이요, 너무 자주 모인다는 것이요, 주일날 잠을 좀 덜 자야 된다는 것이요, 직장 생활이 좀 어렵다고 하는 것일텐데, 이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당한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름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은, 건강 상의 문제나, 재정 상의 문제나, 그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그것이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일어난 것 같다는 이상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로린 자매님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에 당황하거나, 불평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참여함을 기뻐하라
13절 말씀에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서 받게 되는 고난을 말하며, 죄악된 세상에서 의를 행할 때 받게 되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 받는 고난을 말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함에 있어서 받게 되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와 같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인 성숙과 연관이 있고, 하늘의 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으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역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은 고난을 받은 자 일수록 주님의 영광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적은 고난은 작은 영광과 연관이 되고, 많은 고난은 큰 영광과 연관이 된다." 고린도후서 1장 7절 말씀에도 고난에 참여한 것 같이 주님의 영광에도, 위로에도 참여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라고 말하는데, 이는 주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욕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욕을 하고 핍박할 때, 기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베드로는 이와 관련하여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데, 구약에는 성령님께서 내려오셔서 위에 임하시다가 다시 올라가시곤 했는데, 신약에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특별히 고난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크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가 순교 당할 때, "보라, 내가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모든 양들을 안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양들이 당하는 고난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고난받는 자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더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성도들에 대해서 동일하시지만, 또 다른 한편, 주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이 더 크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같이 말합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동등하시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더 큰 것처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동등하시지만, 특별히 주님을 순종함으로 핍박받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관심은 더 지대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한 분이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부자보다 과부와 고아에 대해 훨씬 더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농작물을 다 수확하지 말고, 남겨두어서 고아와 과부들이 먹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십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자들에게 더욱 더 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는, 무익한 고난에 대해 말하면서, 살인이나 도적질,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일 등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무익한 고난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악한 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은 무익한 고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의 거짓말이나, 선하지 못한 행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이를 주님을 위한 고난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러 가다가 과속으로 스티커를 띠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과실로 스티커를 띠게 된 것인데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스티커를 띠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무익한 고난인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으로 인한 고난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잘 하는데, 안 믿는 사람에게 냉정하고, 차갑게 대해서 안 좋은 시선을 받게 되는 등의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그리스도인이 잘못하는 것이지,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단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주님 제가 누구기에 주님 때문에 욕을 먹을 수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한 번 이루어졌고, 지금은 믿는 성도들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무서운 7년 대환난과 백보좌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면, 판단을 받지 않고, 징계를 받지 않지만,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을 경우 심지어 우리의 생명을 취하시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19절에는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이름 때문에, 선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또 베드로는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누가복음 23장 46절에서 주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순교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가 쓴 말인 것입니다. 또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한다고 하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순종함으로 받게 되는 고난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주님에게 맡기고 그 결과를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 앞에 살아간 모든 신앙인들은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살아갔습니다. 신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쉬운 삶을 살기가 힘듭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옛날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고난을 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삶이 무엇인지 모델로서 보여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삶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리빙스턴이라는 선교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라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어떤 일을 당하는 것처럼 당황해하지 말고, 혼란해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기뻐하십시오. 이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세상과 타협하며 산다면, 고난이 더 적습니다. 그 대신 세상에서의 고난과 무익한 고난들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똑바로 서게 되면, 많은 유익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고난을 적게 받으면, 하늘의 영광도 아주 적습니다. 반대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으면, 하늘의 영광은 매우 큽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은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의 기회가 여러분의 앞에 있습니다. 또한 결정은 여러분 자신이 해야 할 것입니다. 잠시 사는 인생 가운데 고난을 받고,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본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시고, 이 땅에서 주를 위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