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광과 고난

2005년 September 18일 ()

본문: 고린도후서 12:1-10 |

주 제 : 그리스도인의 영광과 고난
본 문 : 고리도 후서 12장 1절~10절
설교자 : 조 성 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영광과 고난 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데 우리의 삶에 두 가지 것이 있는데 하나는 영광이요 하나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광만 있다면 늘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고난도 함께 합니다. 그 좋은 예로 사도바울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부와 권력 혹은 육체의 정욕을 만족하게 하는 것 보다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모습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주님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것 보다 큰 즐거움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모세 보다 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내일 하늘나라를 견학하고 그 다음날 돌아온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아마도 세상에서 최고로 좋을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우리의 영적 상태는 날라갈 것처럼 기쁠 것입니다. 바로 사도바울이 이런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이런 체험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힘이 나겠지만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늘 영광과 고난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삶 역시 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힘들 때 주님께서 직접 위로해주시고, 셋째 하늘도 경험하였으니 참 좋을 것이라고 부러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사도바울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좋다고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그와 같은 놀라운 특권과 축복을 갖고 싶기는 하겠지만 그가 당한 고난을 볼 때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사도바울에게 고난 없이 특권과 하늘의 경험만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고난도 허락 하셨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고난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할만합니다. 주님을 전하다 따귀를 맞는다면 그것이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자부심을 가져다 주며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바로 이러한 육체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오로지 즐거움만 있다면 그의 신앙 생활은 참 신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함께 하심과 수많은 계시들, 사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을 통해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많은 계시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늘 풍선처럼 하늘로만 올라갈 수 없도록 밑으로 끌어내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마음 가운데 큰 즐거움과 자부심이 주님 안에 있지만 또한 늘 좌절하게 만드는 그런 연약함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3가지를 주의해서 볼 수 있는데, 바로 그리스인들이 받는 영광이요, 고난이요, 또한 이것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느냐 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큰 교훈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
1~6절 말씀은 낙원(하늘나라)에 대한 환상입니다. 4절에 보면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그곳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보았습니다. 낙원 이라 하면 주님께서 계시는 하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또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맛볼 수 있는 영광이요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주님과의 교제, 하늘나라의 영광, 성령님의 역사와 위로 등등 이런 것들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메마른 종교 생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살아있는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그가 어려울 때마다 주님께서 늘 그와 함께 하여주심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저도 제 삶을 돌아 볼 때 가끔 주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면 그 기쁨이 때로는 며칠, 때로는 몇 달 동안 갑니다. 그것을 자주 체험하면 참 좋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런데 그러한 기쁜 삶에서 우리를 끌어 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육체의 고난 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자랑을 보면 10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 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가난과 약함과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바울 역시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의 연약한 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씩 기도함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고통스러워 했으며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두 가지를 함께 주실까요? 7절에 사도바울은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장점과 약점 모두를 알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육체에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접근 하는데 있어 그것이 걸림이 되었으며 그것을 위해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며 그의 기도를 물리치셨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다면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자신에게 뭔가 부족하게 함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를 동시에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영광과 고통을 함께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에게 고난도 주셨을까요? 만일 사도바울에게 이런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교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아끼고 사랑하셨으며 그를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가시를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어려움도 주님께서 허락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고 교만치 않을 가장 적절한 환경 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상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잘나도 교만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 우리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 것이지 바울을 세상에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하늘에 갔다 오고, 말씀을 잘 전하고, 많은 영혼을 인도하고,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가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를 사람들 가운데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의 육체의 연약함과 고난은 가장 적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환난과 연약함 그리고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의 자고 함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가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어려움은 그 사람이 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 낫을 때 그 사람이 어디로 가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만약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물질을 주신다고 하신다면 얼마를 원하십니까? 전세 사는 사람은 자기 집을 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집이 생기면 더 큰 집을 원할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떠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을 떠나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기 위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많은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더 부해져도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선 틀림없이 그들을 더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한 줄 아십니까?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에 돌 열두 개를 세워두고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며 경배한 줄 아십니까? 놀랍게 찬양했습니다. 그때의 그들의 마음은 다시는 하나님을 떠날 것 같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체적으로 평안하고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근심과 걱정이 없게 되면 조금씩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신앙 좋은 사람이 설마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사도바울과 같이 훌륭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선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자세
고난에 대한 사도바울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이제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했으며. 10절에서는 그것들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내 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머물게 하기 위함이며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난에 대한 사도바울의 자세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말씀하셨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 허락 하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 동일 하지는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오는 즐거움 들이 있지만 여러분 자신 안에 좌절 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여러분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선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여러분 자신 안에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의 환경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손에 의탁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지 했던 사도바울의 자세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땅에서 사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는 것이라고 하면, 현재 여러분이 잘못을 지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고 하면, 여러분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건강, 환경, 사업, 이 모든 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면 내가 즐거움으로 받고 이 가운데서 주님이 영광 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사도바울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세속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우리에게 적합한 환경을 허락하신다고 믿습니다. 저희 집에 꽃나무들이 있는데 어떤 것은 겨울에 집 안으로 옮겨 놓습니다. 겨울에 밖에 있으면 얼어 죽기 때문 입니다. 저는 꽃나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겨울에도 그냥 밖에 둡니다. 겨울에 밖에서도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나무와 화초를 볼 때 그것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잘 알고 고려해 줍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데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살아갈 환경을 잘 알고 계시며 항상 그러한 환경을 조성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