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2007년 March 18일 ()

본문: 로마서 15:1-6 |

주 제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
본 문 : 롬 15:1-6
설교자 : 조 성 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처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임은 드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또는, 출신 학교가 같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내고 하나로 뭉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섬깁니다. 둘째로, 같은 소망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는 정말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실질적인 면에서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첫째로,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강한 자’는 육체적으로 강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강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강한 자’는 어떠한 사람을 말합니까? 사람들은 때때로 강한 자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오래된 자, 또는 구원 받은 지 오래된 자를 강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하거나,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자, 또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고, 많이 배운 사람을 영적으로 강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강한 자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교회에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첫째, 영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교리적으로 건전하게 잘 무장하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또, 이러한 지식적인 면과 더불어 주님을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으며, 주님과의 가까운 교제 가운데서 주님을 많이 닮은 자가 바로 강한 자입니다. 둘째, 인격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자가 강한 자인 것입니다.
반대로, 약한 자는, 성경에 대한 이해 적고, 지적으로, 체험적으로 주님에 대해 잘 모르며, 교리적으로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자입니다. 이들에게 주님께 응답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별 말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았던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린 자들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옛 삶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자가 약한 자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 방탕하게 살았던 삶을 다 돌이키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들에 자주 넘어지는 자들이 바로 약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의 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린 자들이 주는 어려움에 대해 잘 참으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어린 자들의 연약함을 돕는 것이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짐을 지는 것 또한 강한 자들이 해야 될 의무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을 볼 때, 그들의 인내심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어수선하고, 돌아다니며, 한 번에 잘 순종하지 않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그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잘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사들이 그들이 돌보는 대상이 어린 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어린 아이들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강한 자들도 약한 자, 영적으로 어린 자들이 어떠함을 이해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로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는 약한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자입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자기중심적이듯이, 영적으로 어린 자들의 특징 또한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닮지 못한 자이며, 주님의 제자로서 매우 미숙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많은 문제들에 있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음식 문제(제사 음식 등), 율법, 제사나 장례, 날이나 절기 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음대로 이사 가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도 못합니다. 또 율법에 메여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강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또한 깨어 있는 자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들은 많은 문제에서 자유롭습니다. 물론, 믿는 신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자유롭지만, 아직 많은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상에 올려졌던 음식을 먹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이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아직 다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구원받고 나서 율법이 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들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서서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안식일로 생각하여 주일에 무엇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주일이 안식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연약한 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메여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감당하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연약한 자들을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것에 메여 있지 않아도 연약한 자들을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러한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고, 이해할 때,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많은 예들을 통해 하나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첫째,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돌아본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투정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불평을 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날씨가 더워서, 또 길이 좋지 않아서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의 모든 불평과 원망들을 감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장성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모세 뿐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으며,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감당하는 것은 장성한 자의 증표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누가 모세의 삶을, 사도 바울의 삶을 망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고, 참된 복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성경은 고난 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주고, 그분을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보여줍니다. 이 뿐 아니라 섬김을 받는 삶보다 섬기는 삶이 얼마나 더 복된 것인가도 보여줍니다. 섬김을 받기만 하며 살았던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은 섬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정말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기록된 또 다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고, 하늘의 영광스러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또한 새로운 몸에 대한 소망, 즉,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며, 하늘의 기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네 번째 방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막 14:36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땅에서의 주님의 삶은 아버지를 위한 삶이었고, 또 우리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자세를 본받을 때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저는 어렸을 때, 제가 맏이였기 때문에 동생들을 업어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여간 힘들고, 귀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등에 업힌 동생이 오줌을 싸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을 버려두지 않게 되는 것은 그가 내 형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역시 한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금 장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린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장성한 사람들이 어린 사람들의 짐을 져주고, 연약함을 담당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며,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바람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6절)”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바람 또한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감싸주며, 세워주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