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

2005년 May 29일 ()

본문: 시편 17:14-15 |

주제: 다윗의 기도
본문: 시편 17편 14-15절
설교자: 조성훈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오늘 저는 「다윗의 기도」라는 주제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길 원합니다. 사람들은 부와 가난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저는 시편을 읽으면서, 많은 시편을 쓴 다윗도 어쩌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느 경우에는 "하나님, 어찌하여 멀리 계십니까?"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어느 경우에는 "하나님, 왜 주무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말씀에서는 "하나님, 저는 심히 괴롭고 외롭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저는 늘 승리한 모습의 다윗을 생각하면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한 것과 같은 많은 어려움, 시험 등을 당했던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어본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구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분깃을 받는데, 다윗은 여기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왕으로서 많은 제물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이 제물과 하나님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물이 많아도 거기에 치심치 말지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제물이 많으면서 그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사도 요한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이 세상에서의 삶만이 다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칠십, 팔십이 되면 이제 자신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제물을 모아 둔다고 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죽기 직전에 "이제 내 인생은 새로 시작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늘 나라입니까? 다윗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 땅에 제물을 모으고, 사용하며, 누리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신은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있는 것을 자신의 분깃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을 자신의 분깃으로 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삶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 위에 자신의 인생을 쌓는 사람과 이 땅에 자신의 인생을 쌓는 사람들의 삶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매여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그 돈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까?' 에 관심을 갖습니다. 곡식을 많이 쌓아둔 한 부자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이 세상의 물질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부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쉽지만, 그 반대로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자녀로 만족함을 얻는 자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두 번째로 다윗은 자녀로 만족함을 얻는 자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녀로 만족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녀 양육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태교부터 시작하는 자녀 양육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대단할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많은 희생을 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부모들의 교육열은 바로,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마음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녀로 만족함을 얻는 자들에게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윗과 같은 자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었을 때는 훌륭하게 키웠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훌륭하게 키웠을 때는 훌륭하게 키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속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자녀들로 만족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하길 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바로 만족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자기 만족을 위하여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통해서는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이민을 가서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을 키웠지만, 자식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물질을 누리는 데에서, 자식의 성공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에게서 구하소서
마지막으로, 다윗은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에게서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끼가 클 만큼 크면, 둥지에서 새끼를 밀어낸다고 합니다. 낭떠러지에서 새끼를 떨어뜨리고 밑에 가서 다시 받아서 또 떨어뜨리는 훈련을 반복한 다음, 새끼들을 독립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짐승들이 새끼들이 크면 다 독립을 시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더욱 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 든 할머니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자식들의 집에 반찬이나, 야채, 채소 등을 짊어지고 가는 모습들이 죽을 때까지 자식들을 챙기는 우리 한국의 부모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남은 산업을 유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유업을 물려주려고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은 어렵게 살면서도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재산을 물려주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에서 자신의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상속해주는 것으로 자신의 만족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믿지 않는 자녀일지라도 재산을 상속해주기를 서슴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는 인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들의 삶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나이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가난하면서, 주님으로 만족을 얻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부하면서 주님으로만 만족을 얻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만 만족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아뢨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 그의 진정한 만족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고, 쓰는 것, 또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 자녀에게 유산을 상속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30장의 기자도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합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잠언의 기자가 구하는 것은 다윗의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될까 두렵고, 너무 부유해서 하나님을 떠나갈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물질에 상관없이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이것이 잠언 기자, 또 다윗이 한 기도의 핵심입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이렇게 기도하신다면, 우리 교회에 큰 변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기도를 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가난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쉽지만 부하게도 하지 말라는 기도는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부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질이 많을 때 하나님을 떠나가기가 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화를 누리고, 자손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고, 천국 혹은 지옥이라는 영원한 세상에서 지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세상에 만족을 두고 살지 않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4:18) 위대한 신앙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사라질 보이는 것이 아닌, 영원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삶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그 가치를 잘 모르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엇이 남는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이 없이는 그러한 삶을 살기가 힘듭니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좇아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주님의 형상으로만 만족하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자가 진실로 만족을 아는 사람이요, 남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이생에 만족을 두고 사는 자들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주님으로만 만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으로만 만족하는 자가 복 있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주님으로 만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