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2009년 March 22일 ()

본문: 요한복음 11:17-27 |

주 제: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본 문: 요한복음 11장 17-27절

 

설교자: 조 성 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사로에게 오셨을 때는 그가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고통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죽음을 맞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나라가 아름답다고 믿고 있어도 죽음을 앞두고 춤추며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젊은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서글프게 마련입니다. 나사로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은 주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주님은 나사로가 죽어 묻힌 지 4일이 되었을 때 오셨습니다. 중동지역은 우리나라처럼 시체를 땅에다 묻는 것이 아니라 굴이나 바위를 파서 그곳에 시체를 넣었기 때문에 아마도 4일이 지난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시체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입니다. 이제 모든 상황이 끝났고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창조 이후에 지금까지 사람이 죽은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사용하셔서 부활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입원한 환자들마다 구구절절 안타까운 사연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 모두가 죽음 앞에 인생이 허무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욥 14:1-2, 시 90:10, 마 6:29).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보면 인생의 허무함과 고독함, 무상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아픈 사연, 괴로운 인생들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행복하고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제 길로 갔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긴 것입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을 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참 평안과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복권에 당첨되어 큰 돈을 갖게 되더라도 마음 가운데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과 부활이신 그리스도

주님이 오셨을 때 나사로의 집에는 슬픔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 무덤에 묻혔고 장례를 치른 지 4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님은 오셔서 나사로가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날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하나가 무덤에 가서 죽은 자더러 살아나오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무덤에 묻혀 썩어져가는 시체를 두고 그가 다시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화장시킨 사람을 살리지 못하실까요. 물에 빠져 고기들에 다 뜯어 먹힌 시체를 살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은 사람의 몸이 썩었든 썩지 않았든 화장을 시켰든 어쨌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물며 사람들도 연구를 통해 장기를 새로 만들어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데,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일을 하시지 못할까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들이 나옵니다.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5, 41, 48, 51). 또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8:12). 주님 안에 들어오면 빛이 비춰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알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이 안에 있지 않으면 어둠 가운데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12:35)” 또한 주님은 양의 문이라고 하셨고(요10:7, 9),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10:11, 14). 또한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고(요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요15:1, 5)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삶 가운데 주님이 없으면 나중에 삶을 결산해볼 때 남는 것은 수고와 슬픔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이고 그 가지에 붙어있을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부활의 소망

무덤 앞에 서 계신 예수님과 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그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는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 내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신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섬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노아도 죽었고 아브라함도 죽었으며 모세와 아론도 죽었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다들 죽더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할 지 모르지만,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께서 곧 그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무덤에 묻힌 자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도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들을 날이 올 것입니다(고전 15:51-55). 그러나 이 부활을 모두가 기뻐할 일은 아닙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몸으로 부활할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의 부활이고 생명입니다. 이 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은 이후에 부활해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운명이 기다리고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해서 영원토록 멸망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주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6)”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이 복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 이것보다 값진 것은 없습니다(롬 12:12). 이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웃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고난당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