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

2010년 June 6일

본문: 마태복음 22:23-33 |

주 제: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

 

본 문: 마태복음 22장 23-33절

 

설교자: 조 성 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세계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문화를 보면, 죽음 이후 부활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고대 유적들을 보아도 그 안에는 죽음 이후에 죽은 자가 활동한다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넣어주거나 손에 돈을 쥐어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영리한 짐승이라도 사후를 믿는다거나 신을 섬기는 짐승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개하더라도 사람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죽은 자의 시신을 독수리에게 먹여 그 조상이 훗날 독수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유명한 황제 진시황의 무덤에는 그를 지키는 수많은 병정들을 토기로 만들어서 함께 묻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함정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8)”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은 질문입니다. 처음 유대의 종교는 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을 보이시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유대민족의 신앙은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에 이르러 애굽에 종살이 하는 동안, 또한 출애굽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에 와서는 한 하나님을 믿는 그 순수했던 단일신앙이 세 파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바리새인은 하나님과 천사를 믿고, 내세와 부활을 믿었지만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만큼 진리에서 멀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형식 뿐인, 하나님이 없는 종교집단이었습니다. 헌금의 십일조, 곡식의 십일조를 드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섬겼던 종파가 사실은 자기들의 열심, 자기 노력 뿐이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어떻게 이런 자들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은 기독교라고 말하지만 자신을 성령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하나님 어머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예수님의 동정녀 출생을 부인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노아의 홍수나 홍해의 기적을 우화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지만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는 일이라든지 재물을 파는 일 등에 종사했기 때문에 많은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공존하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았으며, 오직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올무에 넣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예수님께 와서 물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결혼한 분은 하늘나라에 가면 아내를 알아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아내가 일곱이었는데 부활하면 누구의 남편이 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살았을 때 가장 사랑했던 여자의 남편이 될까요.

 

주님의 대답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9)” 이들이 진리에서 멀어진 이유는 성경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잘못된 가르침과 이단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을 잘못해석하고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분명히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결혼 관계는 이 땅에 있을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잠자리가 애벌레 상태에서 탈피하여 잠자리가 되어 날아갈 때 애벌레 시절의 자신을 생각할까요. 하늘나라에서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관계는 이 땅에 있을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옷을 입지 않게 하셨습니다. 만일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의류사업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힘들게 농사지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통해 죽지도 병들지도 않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구속 계획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천사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업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것들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존재하는 모든 죄의 결과들은 하늘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32)”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런 것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의 문장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자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 여기서 부활은 첫째로 육체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우리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처럼 살지 않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새로운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가 귀신을 보았는가”라고 했습니다. 귀신은 살과 뼈가 없고 피도 없어 만질 수 없는데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 드셨습니다. 이것이 육체적인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으로 산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옥수수 알갱이 하나를 심으면 아름다운 싹이 나옵니다. 심은 모양과 나온 모양은 참 다릅니다. 호랑나비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나올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인 부활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우리는 주님께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입으신 영광스러운 몸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 되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에게 30대의 나이로 2천년을 살라고 한다면 기쁠까요. 우리 모두가 함께 그런다면 모를까 나 혼자 그렇게 산다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병들지도 않고 수고할 일도 없고 먹든지 안 먹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소망보다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잘 살고 편하게 살 것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5-56)” 우리에게도 스데반에게처럼 하늘나라가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인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에는 영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육체가 떠나갈 때는 하늘나라가 보이고 천사가 보일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마지막으로 운명의 숨을 내쉴 때 천사가 곁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부활의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날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십일조도 열심히 드리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세상에 빠져서 부활도 천사도, 내세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나팔소리가 나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계 14:13).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색깔을 부여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사두개인과 같은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강한 몸으로 머지않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복을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을 보시고 부활의 소망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