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척도

2005년 January 2일 ()

본문: 누가복음 7:36-50 |

제 목 : 사랑의 척도
본 문 : 누가복음 7장 36절 ~ 50절
설교자 : 조 성 훈

새해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새로운 결심들을 하셨을 줄 압니다. 1월 1일부터 창세기를 읽으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 새해에는 좀 더 주님을 사랑해야겠다, 좀 더 열심히 섬겨야겠다 등 여러 각오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 섬김의 깊이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랑의 척도" 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
사랑이 많으면, 주님을 그만큼 더 잘 섬길 수 있고, 사랑이 적으면, 그만큼 주님에 대한 섬김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논리는, 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그에 대한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무엇입니까?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살고 있는 한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에게 와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것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주님의 다리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랑은 항상 표현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사랑은 그냥 말로만 끝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젋은이들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들이 사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매일 만나고, 손에 무엇을 사들고 다니며, 각종 기념일을 지키는 모습을 통해 그들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틈만 있으면, 만나서 선물을 주고, 먹으러 가고, 극장을 가는 등의 많은 모습들이 바로 그들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입으로만 그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마음과 더불어서 행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는 것은 더 많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로 사랑하는데, 주위에서 반대하면, 이생에서 못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동반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줄 아십니까?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으로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죄인인 여인의 차이
오늘 이 말씀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죄인인 여자이고, 또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등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주일날은 하늘이 무너져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안식일을 지켜야만하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정말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매우 정확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에 엄격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창기와 죄인 취급받던 세리. 그밖에 천한 사람들과 가까이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예수님을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했는데, 그는 식사만 대접할 뿐, 그 외에 아무 것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발을 씻기지도 않고, 향유를 붓지도 않았으며, 입을 맞추는 등의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한 여자가 주님께 가까이 갔을 때, 그는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면, 그 여자가 죄인인 줄을 알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여인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죄를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와서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많은 죄를 탕감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을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많은 죄를 탕감 받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합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자, 이 얼마나 멋있는 기도입니까? 나는 우리 교회에 나오는 시원찮은 성도보다 나음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에 기인하는, 이러한 자만심, 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여, 너희가 천국 문에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눈을 뜨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탕감 받은 죄가 적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주님께 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받은 은혜가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적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몰랐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의 빛을 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빛을 졌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모두 탕감 받았다. 그 중에 누가 더 탕감해준 이를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지 어려운 이유는 자기 자신이 죄인인지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여태껏 선하게 살아왔는데, 자기가 왜 죄인이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으로도 흠이 없는 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께 나올 수 있었겠냐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짖고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기독교계에서 이단 취급을 받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가장 크게 핍박하는 사람들은 바로 교회에 나가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이 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 역시 바리새인들이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엄청난 일을 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사두개인,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여기에 나오는 이 여인이라든지, 세리들은 자기들의 죄가 너무도 큰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죄가 너무도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큰 죄를 지고 나서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세리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 불쌍히 여기옵소서. 저는 불쌍한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죄를 못하고, 자신이 잘 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산과 들로 다니다가 사람 하나를 만나면, 너희보다 더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녀가 한 말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 옆에 서서 주님의 발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받은 사랑과, 은혜, 죄를 탕감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 앞에 나와 눈물을 흘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았으며, 발에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죄를 사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탕감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나와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사랑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잠잠히 지낼 수 없게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하면,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아낌없이 우리의 모든 것을 허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실한 사랑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올바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강권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하고, 보고싶게 하고, 사랑을 말하고 싶어하게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숨길 수 없습니다. 보는 눈이 다르고, 하는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면, 귀가 번쩍 뜨이는 등의 모습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로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느끼고 있는, 우리의 죄를 주님께서 탕감하신 정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주님에 대한 사랑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며, 그 죄를 주님께서 탕감해주신 것을 알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의 은혜를 많이 감지하는 사람일수록 그 입에 감사가 많습니다. 여러분께서 형제, 자매님들을 보실 때, 그 입에 늘 감사가 넘치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주님에 대한 은혜를 많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기도를 할 때라든지, 그 삶에 불평이 많은 사람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잘 인식하고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데, 구원받았습니까? 우리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나무나, 돌 등 다른 것을 숭배하는 죄인들이었는데, 은혜를 입어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받은 것을 곰곰이 생각해볼 때에 우리가 받지 아니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만큼, 우리의 입에는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우리가 탕감 받은 죄를 깨달을수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 해 한 해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받은 죄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 간음한 여자를 향해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이 든 사람부터 시작해서 어린 사람들까지 그 자리를 하나 둘 뜨게 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그 자리에서 나갔을까요? 인생을 살아보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아직 자신이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죄를 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보는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모두가 죄 용서함을 받으며,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그 사랑만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탕감 받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척도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기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한 예화를 보면, 어떤 사람이 1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또 다른 사람은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에게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예화를 통해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것과 많은 죄를 탕감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 병고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 한 명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모두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그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기 죄가 탕감 받고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는 자기가 탕감 받았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수십 억을 탕감 받은 사람과 만원을 탕감 받은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 즉 받았다고 깨닫는 사람이 주님을 더욱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기 말씀에 나오는 여인과 같은 사람입니까? 정말로 내가 탕감 받은 죄가 너무 크고,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늘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강권해서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의 원동력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있습니까? 혹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짐이 되십니까?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 지겹거나, 짐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모임 생활을 하는 것, 또, 성경 공부하는 것 등의 주님을 섬기는 일을 너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의 양”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 마음을 강권하면, 그 모든 것이 쉬워 보이는 것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시집을 간 여성들은 시부모님들을 모시는 것, 또 힘든 일들 가운데서 오직 남편의 사랑으로 그 생활을 이겨낸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에베소 교회처럼 모든 것이 의무감이 되고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데, 주님께서 어떤 대가를 치르시고 나를 구원하셨는지, 자신이 탕감 받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될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새해를 맞아 많은 결심을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결심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 결심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엔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은 주님께 나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으며, 향유를 부었을까요? 여인은 그녀가 탕감 받은 죄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한편, 왜 바리새인은 그녀를 정죄했을까요? 그는 주님께 용서받은 것이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죄를 탕감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얼마나 큽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의 천 분의 일만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도 우리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탕감 받은 죄의 천 분의 일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우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사랑의 척도가 우리가 느끼고 있는 탕감 받은 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섬김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모든 죄를 사해주신 것에 대한 인식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때, 자신이 아무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는 자신이 엄청난 죄를 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죄를 진 사도 바울도 그의 죄를 모두 탕감 받은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죄를 진 사람인지를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 탕감 받은 죄들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전 우상을 숭배하고, 나 잘난 맛에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고, 또 이를 용서해주시며, 모든 죄를 사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주신 주님을 생각할 때, 감사의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조용히 여러분들 자신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은혜나 용서의 양이라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좀 더 감사하고,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베풀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도들을 섬겨야겠다는 마음, 성도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탕감 받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