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언약의 위대함

2004년 December 19일 ()

본문: 히브리서 8:1-12 |

제 목 : 새 언약의 위대함
본 문 : 히브리서 8장 1절 ~ 12절
설교자 : 조 성 훈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새 언약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오늘날 너희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들은 백성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을 섬기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나 돌, 혹은 그 어떤 우상을 섬깁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도 살아서, 그 신을 섬기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신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자기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 즉 율법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이를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어떤 신이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계명을 돌에 적어 주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라고 말합니다. 여러 말씀들을 통해, 유대인들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유대인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실 것 같습니까? 좀 특별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 전에 유대인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 특별히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들에게 있는 약속들에 대한 자부심 또한 다른 민족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쯤으로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고 신뢰하는 것들이 그림자에 불과하고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굉장히 도전적인 말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화가 났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믿고 있는 것들이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나올 자가 없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장부터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 제사들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훨씬 더 나은 것이며,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또, 거기서는 완성이 있지만, 여기서는 완성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특권을 받은 민족입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도움을 구했는데, 그 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해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두 명씩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에 가지말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이방 지역을 여행하고 오면, 신발을 벗어 먼지를 털고, 옷을 빨고 나서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자기 나라를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또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생각한 것입니까? 이처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과 제사, 예배에 대한 자부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것들이 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5절) 또한 사도 바울은 하늘에 진정한 성소, 성막, 성전이 있고, 그곳에 진정한 제사장이 따로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제사 제도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온전한 제물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것은 짐승의 제사였습니다. 양이나 소, 염소로 드리는 제사는 사람을 온전히 속죄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제사장이 바뀌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제사장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에 있는 것이 흠이 없었다면, 바꿀 필요가 없었지만, 흠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어야만 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흠 없는 제사장, 완전한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신 제사장이요, 또 온전하신 제물을 가진 제사장입니다.
구약 성경을 공부해보면, 성막에는 의자, 즉 앉는 곳이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항상 서서 같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했습니다. 그 누구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제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드려야했기 때문에, 그들은 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피를 계속해서 바꿔줘야만 살 수 있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그 일을 해야했던 것입니다. 피를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은 언제까지 피를 바꿔주는 일을 해야합니까? 죽을 때까지 해야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계속해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쉴 수 있지만, 구약의 백성들은 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물 자체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전한 제사장, 온전한 제물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을 세운 이유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7, 8절)” 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언약을 파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율법이 흠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완전한 것입니다. 사람이 그 완전한 것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그것을 지킬 수도 없으면,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지만 말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세상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온전한 제물로, 온전한 제사를 통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모세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율법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고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주님께서는 오른 편에서 변호하시며, 왼편에서 모세가 고소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항상, 백성이 죄를 범한다고 고소합니다. 율법을 어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에 가보면, 판사와 검사, 변호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변호사로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일을 다 마친 사람, 즉, 온전한 제사를 마치신 주님께서 앉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일을 마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서서 일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을 보면,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제사장들이 서서 일했으며, 매일 같은 제사를 반복해서 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제사를 드린 그를 영원토록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17절에는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속죄할 어떤 제물도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그 누구도 주님처럼 말씀하신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누구도 쉬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온전한 제물이 없었고, 또한 자신들조차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한 제물을 드려야 했던 그들은 쉼이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제물로 단 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라, 와서 생수를 값없이 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온전한 제물로 단 번의 제사를 통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 분만이 우리에게 선포하실 수 있는 말씀,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영생을 주리라, 내가 너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소망 없이 죄 가운데서 죽어서 영원토록 멸망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율법과 약속을 붙잡고 있고, 그들을 예배와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 중에 누가 예수님을 믿으면, 장례식을 치르고, 호적에서 그를 제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율법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은 죄를 완전하게 속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제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단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다시는 소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 자신에게 나오는 모든 자를 다 구원해주실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제사장로 이 땅에 오셔서 온전한 한 영원한 속죄의 제물을 드리시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누구든지 자신에게 나오는 자에게 그들의 죄를 불법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자는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주님께 나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 방법대로 쉼이 없는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나아가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아무런 제물을 드리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제물을 드립니까? 어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면, 자신의 지나간 죄들이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것을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을 드리심으로 우리는 완전한 속죄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교훈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붙잡고 있지는 않겠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붙잡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야지 하늘 나라에 간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의지하고 구약에 있는 제사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밖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쉼은 없습니다. 앉을 곳도 없고, 쉼도 없고, 단지 모형에 머물러 있다가, 그냥 지옥에 가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서 십자가의 대속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영접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쉼과 속죄를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제물을 드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늘 충전하고 기름을 넣어야 하는 핸드폰이나, 자동차 등을 볼 때에 한 번 충전하거나 기름을 넣으면, 이후에는 또 다시 기름을 넣어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기를 원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상상하게 됩니다.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제물을 가지고 오는 번거로움을 계속 해야했던 구약의 사람들에게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반가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 그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영원토록 용서를 받는 제사,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그 제물이 우리의 죄를 영원토록 속하시고, 우리를 완전한 몸으로 세우시는 일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러한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런데도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자기에게 나오기만 하면,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시며,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말씀시면서, 하늘에 앉아서 기다리시는데도, 예수님께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영원토록 속하셨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시고, 이제는 우리를 완전하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시지 않으신 분들은 여러분의 죄를 속하신 영원토록 여러분의 죄를 속하신 주님을 받아들이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많은 고통을 당하시고, 단 한 번의 속죄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하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생각할 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의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또는 영생을 너무 값없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제를 사서 공부하는 것과 그냥 공부할 때, 마음가짐이 다르듯이 영생도 믿기만 하면 가지게 되니까 너무 값어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값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대가가 지불되었는지를 또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을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돼지를 구원하기 위해 돼지의 몸을 입고 죽을 때까지 살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의 형태로 이 땅에 오셔서 피조물에게 수많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제물을 삼아서 우리가 늘 번거롭게 드려야만했던 제사의 종지부를 찍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하나님의 우편에서 쉬시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돌아보시는 변호자로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님,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결론이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이러한 주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간동안 주님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