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받으라

2007년 April 1일 ()

본문: 로마서 15:7-13 |

주 제 : 서로 받으라

 

본 문 : 롬 15:7-13

 

설교자 : 조 성 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나라도 이제 다민족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 매우 많아졌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다민족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일반 사회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인종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연합하기 힘든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연합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로마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이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 사이의 문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하나가 될래야 될 수 없는 이유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첫째로는, 인종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들이 흑인 자매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흔쾌히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힘들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 인종의 장벽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장벽은 이보다 더 심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말씀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제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결혼하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에게는 음식과 문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그들의 부모를 장사한 후, 그 무덤에서 나오는 구더기를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구원받은 그 부족 사람이 여러분과 함께 교회에 나온다면, 여러분은 그 부족 사람과 함께 식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도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구원을 받고,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수천 년 동안 달리 살아왔던 그들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그들에게는 빈부의 차이와 배움의 차이에서 비롯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에 보면, 그들이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차별의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 될 수 없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부의 차이, 배움의 차이, 지역의 차이 등은 여전히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막는 것들 입니다. 중매를 하다보면, 배움의 차이에 대한 벽이 존재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살아보면, 학력의 차이는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외모의 차이 역시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속사람이 중요한 것이지, 외형적인 어떤 것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받아야 했던 이유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이방인들의 구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구약의 말씀들을 이용해 이를 말하고 있는데(삼하 22:50, 신 32:43, 시 117:1, 사 11:10, 행 15:14-17, 롬 3:29), 이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의 구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설명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 신자들도 마땅히 받아야 할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7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받아들인 것 같이 여러분도 형제를 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을 했던 것은 그들이 서로를 받는 데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를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받으실 때,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짐 진 모든 자들, 즉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자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주님께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굉장히 심한 차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할 때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온갖 더러운 짐승들을 보여주시며, 그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더러운 짐승들은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토록 이방인들을 더럽고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그것들을 절대로 잡아먹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내가 깨끗하다고 말한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깨끗하고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저마다의 이유, 예를 들어, 자신보다 학력이 낮다든지, 혹은 가난하든지, 가난해보인다는 이유로 모든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의롭다고 선포하셨는데, 내가 그를 의롭게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더군다나 죄인인 우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눅 15:10) 또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완벽한 상태일 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받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차별하지 않고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믿음이 좋지 않은 성도를 차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주님 앞에서 잘못된 자세입니다. 주님은 죄에 빠져 있던 우리를 아무런 차별 없이 받으셨으며, 나아가 우리를 받아들이시기 위해 우리의 약점을 자신이 감당하셨습니다.(마 8:17) 주님과 우리의 수준은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우리가 수준이 안 맞는다며 교제하기를 꺼리는 그 사람과의 수준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주님은 그 수준 차이를 주님 자신이 친히 메워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우리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감당하셨듯이, 우리 중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감당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성도들 간의 수준 차는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배려하고, 감당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우리를 받으시기 위해 주님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다른 형제, 자매들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연합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이 연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첫째로, 성령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엡 2:11-18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 안에서 화목하게 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고, 엡 4:3-6에서는 성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믿는 모든 신자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 됨으로 인하여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요 13:34-35) 그리스도인끼리 싸우는 것처럼 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신분이든지, 얼마나 배우고, 얼마나 부자이든지 상관없기, 그러한 모든 것들을 버리고, 서로 하나 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 기쁨과 희락이 있을 것이며, 평강과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를 받아서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었으며,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형제, 자매들을 서로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 교회 안에는 성도들 사이의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능력 있는 전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큰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15:13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하는데, 그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기를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 될 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결론

 

교회 안에는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배움의 차이, 부의 차이, 외모의 차이, 구원받은 연수의 차이, 성경에 대한 지식의 차이 등등 너무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하였든, 우리는 서로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으시기 위해 그분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으며,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형제, 자매들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약점을 감당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함으로 우리가 하나 됨을 나타내고, 하나 됨을 힘써 지킬 때,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