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구주

2007년 December 23일 ()

본문: 요한복음 4:39-54 |

주 제: 세상의 구주

 

본 문: 요 4:39-54

 

설교자: 조 성 훈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며칠 뒤면 성탄절인데 그날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아주 유명한 분이 오신 날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태어납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출생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때로 어떤 사람의 출생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1889년 4월 20일에 출생한 ‘아돌프 히틀러’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합니다. 그의 출생이 수많은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오래 전에 왕으로 태어난 석가모니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행을 하게 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밖에 나와 삼보일배를 하고 구걸을 합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과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분이 만일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소망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녀에게 필요한 영적인 생수를 주었습니다. 구원받은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마을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전했습니다. 여인은 나의 모든 과거에 대해 모두 말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전도의 방법입니다. 전도는 단순히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이 그곳에 더 머물기를 청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인도되어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믿음

 

이 때 사람들이 한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였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다시 말하면 소개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를 ‘중매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도자는 예수님과 우리를 중매한 사람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그분께 반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중매했고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인에게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있는 것이지 전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신랑의 얼굴도 모르고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빌립이 가서 예수님을 전하자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며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 1:45-49).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책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그분과 동행함을 통해 알아가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예수님의 실체를, 그분의 살아계심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이론적인 분이 아니라 실제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으나 낙엽이 흔들리고 우리의 피부에 바람이 와 닿을 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그분의 살아계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지 20년이 넘은 사람이 아직도 삶 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이 없고, 그저 처음 믿을 때 받았던 말씀만을 붙들고 있다면 그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말씀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해나갔다면 그가 직접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을 것입니다.

 

개미들이 모여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마 사람의 존재를 가지고 논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개미는 없을 테니 저마다 체험한 사람의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도 그와 같지 않을까요.

 

선지자와 고향

 

주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가족과 고향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과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족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도함에 있어서 내 삶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의 간청과 믿음

 

본문 말씀에는 왕의 신하가 자신의 아들을 병에서 낫게 해주기를 구하고 예수님이 그를 살려주시는 표적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표적을 구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눅 11:16)”,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사실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 등의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48절). 사람들은 한번만 주님의 표적을 보면 평생 믿음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수많은 표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이적입니다. 잔디밭에는 온통 거미줄이 가득합니다. 개미가 먹이를 찾으려고 자기 집을 나와 밖을 돌아다니다가 그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병균이 우리의 손에, 수많은 발암물질이 음식에 있지만 그것을 먹고도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적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이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이와 같이 편안히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고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면 불신자들은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고전 1:23). 어떻게 그 사실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느냐고, 하늘나라가 정말 존재하기나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불신자들이 신자보다 믿음이 더 좋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불신자들이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건국신화를 보면 곰이 마늘과 쑥을 가지고 동굴에 들어가 3개월을 견뎌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와 같이 허황된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까. 세상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우연히 단백질이 생겨나 그것이 나무도 되고 원숭이도 되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표적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표적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아마 표적 몇 번이면 한 순간에 세상사람 모두를 구원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할 수 있겠지만,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결론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형성되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의 말을 통해 메시야를 만났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참 구세주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다른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분을 만나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예수님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향 사람과 가족에게 전도하는 일이 쉽지 않다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주님의 모든 역사를 볼 수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적은 우리의 믿음을 나아지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만이 예수님을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리라고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표적이 아닌 믿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