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면류관

2009년 January 4일 ()

본문: 디모데후서 4:6-8 |

주 제: 승리의 면류관

본 문: 디모데후서 4장 6-8절

설교자: 조 성 훈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했을 때 그가 떠날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애에서 가장 솔직할 때는 단 두 번, 즉 태어났을 때와 죽을 때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외식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점 자신만의 움막을 지어 숨어 살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다가 죽기 전에 원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죽는 순간에 하는 마지막 유언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최고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죽기 직전의 말인 것입니다.

 

불교계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성철 스님은 참 대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 식사가 한 수저 삶은 콩 11~12개, 생솔잎 가루 낸 것 한 수저, 맑은 약수물이 전부였고 호두, 잣, 들깨, 밤 등의 나무 열매 등을 토종꿀에 버무려 대추알보다 조금 클 정도로 돌돌 구슬처럼 말아놓고 이것도 하루에 한 번만 먹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벽에 기대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앉아서만 8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신 분이 마지막으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말이 충격적입니다.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이 사람의 말이 승리자의 말입니까, 패배자의 말입니까.

 

여기 사도 바울의 말은 어떻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그 어떤 종교 지도자도 이와 같은 말을 남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승리자의 외침입니다.

 

다가온 이별의 시간

 

이별의 순간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도 고린도 교회도 교회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을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그는 떠나가야 했습니다.

 

“관제와 같이”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내가 주어 거하게 할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으로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는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삼분지 일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민 15:1-3)”―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으로 붓는 포도주 제사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보고 마지막 전제까지 부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즉,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러분도 사도 바울과 같이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끝나고 순교당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는 신앙생활을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 신앙생활은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 싸움, 어둠의 권세자들과의 전쟁입니다. 또한 씨름이기도 하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나그네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벧전 1:17).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사도 바울은 30년 동안 신앙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마라톤 선수가 달려갈 코스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와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목숨을 내어놓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기자들, 그리고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그 결승선에 주님께서 면류관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모두 똑같은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에게 달려갈 길이 모두 각자 다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여러분은 선수입니까, 놀러온 사람입니까. 선수라면 달리다가 쉬거나 달리다 마냥 노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잠시 세상에 나갔다가 돌아오고 또 달리다가 잠시 쉬고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주님은 물론이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와 같은 자기 앞의 경주를 경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달려야 할 길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막 1:38, 요 18:37, 히 10:7). 사도 바울은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더 성공하고 물질을 많이 모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달려갈 코스가 아닙니다. 장가도 들고 애기도 낳고 열심히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경주를 경주할 때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경주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주어진 길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행 13:25)”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거 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도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달려갈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까.

 

믿음을 지켰으니

 

마라톤을 보면 수백 명이 출발하지만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지막까지 믿음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27)”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7-8)” 고대의 마라톤 선수들은 경주를 할 때 옷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모든 것을 절제한 뒤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승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으면 그 영광을 사는 동안 누릴 수 있지만 하늘나라의 면류관은 영원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것은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또한 “기쁨의 면류관(살전 2:19)”,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의의 면류관(딤후 4:8)”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판검사가 되기 위해 산속에 들어가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성공하면 잘 살 것 같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면류관은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나라의 성문에 우리의 이름을 기록해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생활의 경주가 어려운 것을 아시기 때문에 승리자들에게 늘 격려하셨습니다. 내 나라를 그들에게 주어서 만국을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6-27)”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영광을 받을 것인지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의 영광은 잠깐이고 하늘의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8)” 주님을 위해서 달리는 사람들만이 주님의 오심을 사모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비극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하늘나라에 가는데 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고백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감사한 것은 우리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 소망이 없는 분들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이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또한 믿는 우리들은 이 소망을 바라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