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에 기록한 편지

2006년 October 8일 ()

본문: 고린도후서 3:1-6 |

주 제 : 심령에 기록한 편지

 

본 문 : 고후 3:1-6

 

설교자 : 조 성 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

 

본문에서는 ‘천거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 받던 시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죽이러 다니는 자들이 있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는 천거서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 역시 성도들이 천거서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중요시되었었는데, 이는 그 때 당시 많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11:13, 행 15:1, 갈 2:4) 오늘날 또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 미치는 해는 상당히 큽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여행을 하거나, 교회를 옮길 경우에는 교회에서 천거서를 보내어, 천거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믿는 자임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하고 있을 당시에는 특별히 예루살렘으로부터 천거서를 받아서 가지고 다녔던 많은 거짓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 교회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란 곳에서 왔다고 하면, 지방에 있는 성도들은 권위 있는 사람으로 그를 받아들였고, 그 중에 거짓 교사들이 많은 해를 끼쳤던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거짓 교사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서, 사도 바울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비롯한 여러 말씀에서 이를 변호하면서, 사도 바울 자신이 천거서를 가지고 다녀야겠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전도하여 구원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증거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직에 대한 반대를 받은 데에는 두 가지 면에 있는데, 첫째로는 그가 예수님께서 택하신 12명의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은 분명히 주님을 보았으며, 주님께서 보내서 사도가 된 사람임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또 한편,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글에는 능하나 말은 잘 하지 못한다고 공격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불신자에게 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사도가 아닌 것이 아니며,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장로들로부터 천거서를 가지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가야겠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 구원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자신이 사도인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절)

 

심령에 새겨진 천거서

 

‘천거서’는 그 사람이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행을 갈 경우나 교회를 옮길 경우에 천거서를 가지고 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그 교회에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잘못 인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천거서를 요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거서는 편지에 써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편지에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써 있어도 그 사람이 진정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구원 받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표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천거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성도됨의 증거는 그 열매이며(마 7:20),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사도 바울의 열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맡을 수 있는 향기, 또는 읽을 수 있는 편지는 바로 그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향기, 하나님의 편지이며, 이것이 믿는 자의 가장 큰 천거서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말하는 것이나 편지,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천거서(신자 됨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기신 살아있는 천거서가 그 마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밖에 보일 수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여자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행함이 없이는 그 믿음은 드러날 수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 행위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이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이 행위가 믿음을 말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밖에 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한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을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고맙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네 양을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돌아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믿음 역시 삶의 열매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 받은 연수를 성숙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성숙을 말해주는 것은 구원 받은 연수가 아니라 우리의 행함,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에게 나타내는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그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 즉, 물질이나, 찬양 등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능력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 즉 전도까지도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받을 만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들의 흠을 찾는다면, 사랑할 사람이 없습니다.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년 동안 들으면서도 그 안에 깨달음이 없다면,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안에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확신과 만족의 근원

 

4-5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확신과 만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로, 그는 많은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말씀에서 이를 말하고 있고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고전 1:1)”,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7)” -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자기 자신이 복음을 위한 사도로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말했고, 딤후 1:1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신뢰하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그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믿음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만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5절)” 그는 첫째로, 만족이 자기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그 어떤 환경도 여러분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 만족은 목마른 것이며, 진정한 만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환경에 만족을 두곤 합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아이들이 크면, 괜찮아지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런 형편이 오면, 또 만족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만족은 환경이나 우리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며, 물질이나 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만족을 주님에게서 찾는 사람은 거듭날 때부터 계속해서 만족할 수 있지만, 환경에서 만족을 찾는 사람은 환경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또 그렇지 않을 경우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 만족을 주님에게서 찾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 그가 믿는 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 만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일꾼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언약은 신약을 말하는 것이며, 옛 언약은 구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계명 아래서 살았는데,그 때에 모세를 비롯하여, 제사장들과 또 찬양의 일, 제사에 관련된 일 등 여러 측면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옛 언약의 일꾼들이 대단히 영광스러웠다고 말하면서, 신약의 일은 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 또 복음 전파와 연관된 모든 일 - 예배, 성경 공부, 성도 사랑, 등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청소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옛날에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서 청소를 하는 일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며 세우신 새 언약의 일꾼들입니다. 말씀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청소하는 일은 덜 중요하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이 새 언약과 연관된 일이라면, 그 일은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한 가지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하게 여겼던 일, 또 그 일을 한 사람을 주님께서 존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모일 때마다 싸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어린 아이를 가리키시며, 크고자 하면, 낮은 자,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시든지, 그 일은 세상 사람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이며, 인간의 가치로 가치 매겨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새 언약의 일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주님을 그 일에 대한 충성도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이라고 해서 좋은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는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맡고 있는 일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지 사람이 맡긴 일이 아님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교회이지, 사람의 교회가 아니며, 주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

 

첫째, 천거서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이 맺는 열매가 믿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해줍니다. 이것은 심령에 기록된 것이지, 종이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의 확신과 만족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확신하고 신뢰할 때, 우리의 만족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 언약의 일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맡았든지 그 일에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일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기시고 새 언약의 일에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