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보여주소서

2008년 October 12일 ()

본문: 요한복음 14:7-15 |

주 제: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본 문: 요 14:7-15

 

설교자: 조 성 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믿음에 의지하기보다는 보는 것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빌립은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녔던 사람이고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을 보고 경험한 자입니다. 그와 같은 기적을 봤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빌립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많은 이적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응답받는 시간을 정해놓았다고 합니다.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결국 기도가 이뤄지지 않자 그는 마음속으로 ‘그럴 줄 알았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기를 바다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떼를 써 봐야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떼를 쓸 때가 있습니다. 수없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달라고, 어떤 일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려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방식의 생각일 뿐, 하나님은 늘 다른 방법을 택하십니다.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 분이시면서 하나이신 ‘삼위일체’는 사람들이 알기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기 쉽게 하려면 사람이 아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여기 ‘아버지’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은 아버지라는 의미는 아니므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감각기관이 있는데 사람들은 주로 시각과 청각에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눈으로 보길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은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오직 한 가지 다른 감각기관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청각이나 시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지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것 역시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 살아있을 자는 없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제한된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그가 본 뒤 며칠 동안 얼굴에 광채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쳐다 볼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33:18-23).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 만족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눈물로 감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사와 만족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그대로 평생을 믿음을 잃지 않고 만족하며 살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만족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 살아있는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것도 하리라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것도 하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것이라는 의미,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행 1:8). 그러나 예수님보다 더 큰 역사를 하거나 더 큰 능력을 베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기도 응답의 목적이 우리의 사사로운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

 

신앙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히 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표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구약의 성도들을 향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1:27). 주님의 증인 중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4)”고 했고,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눅 1:1-4)”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18)”고 증거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주님이 3년 반 동안 유대에서 사신 삶 자체가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 등 표적의 역사가 매일매일 일어나는데도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은 그 표적의 홍수 속에서 표적을 볼 수가 없었을까요. 표적에 의지하는 사람은 엄청난 표적이 그의 삶에 나타나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들이 진리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본 사람은 이전에 이와 같이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지식의 본질이 되시는 분이 매일매일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거기서 진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이요, 배운 것 없고 졸업장 없는 무식한 사람의 모습이었으므로 주님에게서 지혜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의지했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해서 주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믿음에 의지한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행위나 표적, 지식에 의지하게 될 때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결론

 

어느 날 저는 목회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주님께 기도하기를, 주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보여주시면 목회를 계속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표적이 없어 낙심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 어느 날 저녁에 찬송가를 부르다가 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507장 2절에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라는 구절이었는데 그것이 주님이 제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우리는 왜 이같이 표적에 매달릴까요. 우리의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 나누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접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해 주시는데, 우리는 늘 시각과 청각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혼자 방에 들어가셔서 5분 정도 조용히 기다린 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그러면 순간 순간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관여하시고 인도하셨는지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한 고백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시편 42:6)”고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낙망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표적이 아니라 영혼을 통해서 영적인 하나님을 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과 같이 하지 맙시다. 우리가 주님께 ‘사랑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주님은 ‘내가 이토록 너를 사랑해왔는데 너는 지금도 내 사랑을 의심하느냐’하실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의지하며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