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의

2006년 September 10일 ()

본문: 로마서 4:1-12 |

주 제 : 아브라함의 의

 

본 문 : 로마서 4장 1절 - 12절

 

설교자 : 조 성 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 죄에서 해방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죄에서 해방받기 위해 많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인들의 고민 역시 그들이 말하는 108 번뇌에서 해방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번뇌의 근원이 욕심이며 그러한 것들을 벗어버리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힌두교 인들 역시 330만이나 되는 그들의 신에 의지하여 그들의 죄에서 해방 받기를 원합니다. 세계 각 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서 해방 받으려는 노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선한 일에 매진하기도 하고, 또 그들이 믿는 신이 그들의 죄를 씻어주기를 원하여 제물을 드립니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강물에서 몸을 씻으면 그들의 죄가 씻겨져 내린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적은 종이를 태우기도 하고, 열기구에 띄어 보내기도 하면서, 그들의 죄에서 해방 받으려는 갖가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대면서,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확고한 믿음의 표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있었고, 또 신앙의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브라함이 반드시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또는 신실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앞서 3장 28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본문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어떻게 - 믿음으로 - 의롭다 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모든 행위에는 자랑, 즉, 교만이 따라옵니다. 행위와 자랑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행위에 근거를 두면, 서로의 비교도 따라오고 교만도 따라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교만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주일마다 봉사도 하며, 여러 가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위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과, 자랑, 교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를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믿는 신자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라고 말하면, “무엇을 잘 했다고 하늘나라에 가느냐?” 며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잘 해야만 하늘나라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본문 말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입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으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어 자기 종이 자기의 후사가 되어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자기 종을 취해 자식을 나아 후손으로 삼으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인 사라가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행위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았을 때, 그가 하나님을 불신했던 경우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라는 것을 믿고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 받은 후에도 항상 신앙, 즉 삶이 좋아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행함으로 구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린 이미 의롭게 됐기 때문에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에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을 아니한다는 것은 선을 행하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7절, 8절에서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다윗 역시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 또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셨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떤 죄를 얼마나 지었느냐에 상관없이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심을 믿고,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의 모든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사해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삶을 보고 의인이 아니라며, 하나님께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사람이 의인입니까? 저 사람은 죄도 많이 짓고, 잘못도 많이 했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의인입니까?” 라고 물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는 내가 보낸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니라. 나는 그의 행함이 아니라, 그 믿음을 의로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을 생각할 때,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거나, 거짓말쟁이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9절부터 12절 말씀에는 할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였고, 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 된 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의롭게 된 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삶이 엉망이고 타락했을지라도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고, 타락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구원은 예정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하나님의 자손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의롭게 된 것은 인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으며, 부활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신앙의 고백을 의미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할례, 또는 세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를 구원의 징표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구원과 할례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행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 좋은 예로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을 비롯한, 노아, 모세 등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에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 다메섹으로 가던 중 사도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성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또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감정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의롭다 선포하십니다.

 

믿는 우리들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실망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