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대한 인식

2017년 July 2일 ()

본문: 마태복음 16:13-17 |

제목: 예수님에 대한 인식
본문: 마태복음 16장 13-17절
설교자: 조성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더러는 엘리야, 요한 등으로 말했습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다시 말하면 “너희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라는 물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저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하신 질문, ‘너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니, 너는 나를 사랑하니?’라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너희 삶에서 나는 누구냐고 질문을 하셨을 때 대답하기 참 어려웠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밥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주님의 이 물음에 답하기 어려웠습니다. 뭘 가지고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인가? 주님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저는 그 질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을 찾았습니다. 저의 어떤 삶에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수십 년을 주님을 섬겨왔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좀 이상해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주님을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참 많이 나태해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소돔의 죄는 안락함과 태평함, 물질의 풍부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죄악으로 이끈 것입니다.

매일 날씨가 좋으면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곡식이 자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항상 풍족할 때 가져오는 것은 영적인 타락입니다. 제 자신을 돌이켜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성경책이 버려져있으면 주워 씻어서 집에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안에 있는 성경책이 천덕꾸러기입니다. 처음 가지고 있었던 주님에 대한 경외함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앞자리에만 앉다가 한동안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어떤 경외함이 드러날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에서 본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늦게 오면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들어오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시간에 움직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숫자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 교회는 실패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물었습니다. 직장에 한 달에, 일 년에 몇 번 정도 지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직장 출근시간에는 늦지 않으면서 교회에는 자주 늦습니다. 당신은 삶의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입술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 물질을 드리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나의 태도에서 하나님 경외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기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훨씬 율법을 잘 지켰지만 하나님 경외함에서 떠나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상시 삶에서 하나님 경외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 생신이라고 꽃 한 송이를 사왔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참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에 있어서 그분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정말 그분이 나의 창조주일까, 내 모든 삶을 주관하는 분일까? 주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요술램프는 아닐까요? 필요할 때마다 문지르는 요술램프 말입니다. 공무원 시험을 보는데 좀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요술램프는 아닐까요? 그는 창조주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나의 모든 죄를 속하시고 나를 구원하셔서 영원토록 하늘나라에서 살게 하신 분입니다. 인생은 참 비참합니다. 결론이 영원한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망 없는 나를 구원해주셨는데 나는 그분을 얼마나 경외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계십니까? 주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입니까? 현재 주님을 대하고 있는 자세들이 주를 기쁘게 할 수 있고 주를 신분에 맞게 경외하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은 마땅히 우리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항상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대상입니다. 주님은 내 삶에서 빼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몇 년 살면 존재를 잘 못 느끼지만 잠시 떨어져있으면 그 빈자리를 느낍니다. 주님을 빼버리면 내 삶은 생각하기도 힘듭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아주 멀어져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너무 물질적으로 여러 면에서 편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점점 사라지고 내 마음이 차츰차츰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이 나태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때때로 외식도 하고 돈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리는 헌금봉투를 가지고는 망설입니다. 주님을 예배할 때 일 년이 가도 2년이 가도 감사의 표현을 하지 못 한다면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의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내가 어떤 면에서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대하고 있을까요? 주님은 ‘너희는 나를 대하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순종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무한한 은혜를 베푸신 분이고 내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제 모든 재산을 털어서 어떤 사람을 도왔는데 그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를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원토록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나를 주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 큰 은혜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내 영혼에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소욕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대로 살려고 하면 육신의 소욕이 난리가 납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태평하게 바닷가에서 낚시만 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생각은 너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정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망설이게 되는 대답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주님을 경외함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몇 개월 동안 뒷자리에 앉아 성도님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내가 양들을 잘 이끌었는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시작되면 밖으로 나갑니다. 말씀을 듣기 힘들어서일까요?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수많은 성도들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도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말씀시간을 줄였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시간이 30분만 넘어가면 힘들어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어디에 나타나있을까요?

저는 여러분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입으로 말고 삶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무엇을 가지고 말하겠습니까? 주님이라고 할 때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참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제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삶에서 주님을 빼버린다면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제 삶에 깊이 관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못하지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주님의 자리를 찾고 싶습니다.’라고 결론을 지었지만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고 이 문제에 대해 갈등하고 마음이 아프고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아픔과 고통과 갈등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주님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 삶에 어떤 면에서 예를 들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실질적으로 삶에서 주님이 주인 자리에 앉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에서 주님이 존경받으시도록 그런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오심이 가깝고 우리는 머지않아 천국에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