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어린양

2007년 September 30일 ()

본문: 요한복음 1:19-28 |

주 제 : 하나님의 어린양

 

본 문 : 요 1:19-28

 

설교자 : 조성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하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우리는 본문 말씀으로 통해서 세례 요한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임무를 다 했는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궁금증

 

19절에 바리새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나타난 선지자인 요한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예언 활동이 중단되었고,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과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고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나타나서 그들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요한이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종파를 보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독교가 너무 성경에서 멀어졌다고들 말하는데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왔을 당시에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이 세 종파는 세례 요한이 왔을 때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두개파는 부활도 믿지 않고,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부활과 천사를 믿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는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예수님이 동정녀에서 태어난 것도 믿지 않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것, 노아 방주 사건도 믿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 나타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을 받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에서 너무 멀어져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이단이라고 몰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단의 기준은 참 이상합니다. 교인의 수가 적으면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작고 교인의 수가 적을 때는 이단이라고 불리우지만, 교회가 커지고 인원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으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종파들이 하나가 되어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이단을 몰아서 십자가에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을 세분화하여 지키면서 하나님보다 장로의 율법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안식일과 십일조에는 관심을 두었지만 더 중요한 것들은 버린 것입니다. 에센파는 세상이 타락했다고 하여 광야에 들어가 자기들끼리 거룩을 지키고 살았던 폐쇄적인 종파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오신다면 공중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생각합니다. 어느 가난한 마을에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모두 웃을 것입니다. 시편 40편 10절을 보면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 9장 6-7절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가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23장 5-6절에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그들을 구원하고 더 이상 자신들에게 고통과 슬픔이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주고 더 이상 신음이 없는 세계를 보여줄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온 메시야는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메시야를 증거해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가 아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소개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많이 연구했기 때문에 메시야가 어떻게 오실 것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두 가지 모습으로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성경학자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광 가운데 오실 메시야 뿐만 아니라, 동료에게 은 삼십에 팔릴 것, 십자가에 못 박힐 것 등의 예언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였다면 두 메시야의 모습을 구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요한을 보고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자칭 그리스도가 많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것이 아니지만, 따르는 무리들이 그렇게 치켜 세워 스스로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라고 할 때 또한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4장 5-6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의 심정으로 세상에 와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가 왔으되 사람들이 그들을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분명하게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23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요한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교회의 상황이 그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5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증거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민족이기 때문에 요한이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의 어린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죄를 지을 때마다 드리는 속죄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죄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죄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가리킵니다.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만약 그들이 요한의 증거를 받고 메시야를 알아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그를 섬겼다면 아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결과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예언한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장 30-34절을 보면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가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노라 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가 나보다 앞섰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에게 이해시켜야 할 때, 때때로 우리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빈정거립니다. 우리가 말하는 예수님과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는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그와 같이 말했을 때에도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든 놋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도, 모든 절기도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인간의 용어로 설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개미에게 컴퓨터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하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감옥에 갇혀있다가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을 맡은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일입니다. 그는 매우 중대한 특사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중에 요한처럼 살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광야에서 살다가 감옥에 갇히고 결국 목이 잘려 죽은 요한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결론

 

그는 홀로 이 어려운 세상에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증거한 분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는 달랐고, 그들의 종교가 하나님의 아들을 맞기에는 너무 멀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요한과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하는 동일한 위치에 있습니다. 동일한 환경에 처해 있고, 동일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담대하게 이 세상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소개했으며 어떻게 그의 의무를 마쳤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겸손하게 예수님을 높였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그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고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로 큰 기쁨을 삼았던 그의 충성스런 모습을 보시고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