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의 고통과 기쁨

2009년 August 2일 ()

본문: 요한복음 16:16-22 |

주 제: 해산의 고통과 기쁨

본 문: 요한복음 16장 16절-22절

 

설교자: 조 성 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임신해서 배가 점점 불러오는 임산부들은 해산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배가 점점 불러오고 배 안에서 태아가 발길질을 하기라도 하면 참 답답할 것 같은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임산부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암이 걸리거나 살이 쪄서 배가 나오면 기뻐하지 않지만 아이를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면 오히려 기뻐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고난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기쁨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는 말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13:33)”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 13:36)” 나의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이고, 후에는 따라 오리라는 말씀은 주님의 부활과 훗날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문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16: 17,18)”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부터 자신이 죄인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2)” 주님의 관심은 늘 영혼 구원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슬퍼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6:34, 마 9:36-38, 요 4:35, 눅 19:41-42). 그러나 제자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크냐 하며 싸우기도 하고 어머니를 통해 주님께 부탁하기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 제자들은 겨우 12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열을 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왜 오셨고 주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불타 없어질 이 지구에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와 거리가 멀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성도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노년을 편하게 살까, 자식을 성공시킬까에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바쁩니다. 아마 죽을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그렇게 바쁜 것입니까. 주님이 얼마나 가까이 오셨는가, 세상의 마지막이 얼마나 가까워왔는가 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설명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19-20)”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큰 슬픔이요 고통이 될 것이나, 세상은 큰 기쁨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큰 근심이었던 것이 도리어 큰 기쁨이 될 것은 주님이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14:28)” 이 말씀은 주님이 하늘나라에 가실 때 슬퍼하겠지만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임신해있는 것과 같습니다. 앉기도 힘들고 다니기도 힘듭니다. 해산의 고통은 어떻습니까. 아이를 낳고나면 다시는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얼마 지나면 그 고통을 잊고 또 낳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은 이후의 즐거움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잊는 것입니다. 태어난 아기를 두고 “내가 너 때문에 고생했다”며 아기를 구박하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주님도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생각하시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주님도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주님이 주신 선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1-22)” 아기를 낳은 자매님들 중에 아기를 볼 때마다 해산의 고통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기쁨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잊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역을 해산의 고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맺어지는 열매 때문에 기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53:11)”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주님의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가 얻은 것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이자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원하는 것들입니다. 진시황은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에 불로초를 구하게 명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지만 세상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결론

 

현재 우리의 삶은 해산의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해산의 고통 뒤에는 고통을 잊어버릴 만큼의 기쁨이 오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 눈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더 큰 기쁨 때문에 생각지 않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많은 영혼을 얻는 것 때문에 큰 고통을 잊어버리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늘나라의 기쁨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의 고통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곳에서 어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겠지만, 그에 비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족이 곰팡이 나는 지하 셋방에 살다가 40평짜리 새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들이 새집에서 살면서 예전에 살던 집을 계속 생각하며 근심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새집에서의 즐거운 생활 때문에 과거의 고통은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늘나라에 가면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기쁨 때문에 과거의 모든 수고를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잠시이고 곧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기쁨은 영원하고 절대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 후면 이러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