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인 잔치

2007년 October 28일 ()

본문: 요한복음 2:1-12 |

주 제: 가나의 혼인잔치

 

본 문: 요 2:1-12

 

설교자: 조 성 훈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가나의 혼인 잔치에 대해서는 주일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소개되는 이적들은 모두 그 목적에 부합되는 것들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 중에 자신의 기록 목적에 합당한 이적들만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적합한 이적들을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종으로, 누가는 인자로 드러낼 수 있는 이적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이적을 사용했습니다. 본문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나타내고 있고, 4장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것은 주님이 거리와 상관없이 그의 능력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예수님은 시간과는 상관없이 병자를 고치실 수 있음을 보여주고, 6장의 5천명을 먹이신 이적은 주님께서 생명의 양식인 것을, 물위를 걷고 잔잔케 하신 것은 주님은 자연 위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것(9장)은 예수님이 세상에 빛이신 것을, 나사로를 살리신 것(11장)은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드러내는 이적들입니다.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예수님 가족

 

본문의 시기는 아직 주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지 않은 때,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계실 때입니다. 아직 제자들이 모두 주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마리아와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이 초대된 것과 그들에게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예수님께 의지한 것을 보면, 이 혼인잔치가 있었던 집은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모자란 포도주와 예수님의 대답

 

잔치 중에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라면 신랑의 부모님의 걱정하고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걱정을 했습니다. 아마도 준비된 포도주가 그것이 전부이고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부모들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그것을 공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도움을 청하러 가야할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그 사실을 알리자, 예수님은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여”라는 표현은 상대를 천시여기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 그것은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여자여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말했을 때 주님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잉태될 때부터 동방박사나 목자, 선지자, 천사들이 한 말들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우리의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 찾아가야 할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그분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으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마리아의 명령

 

5절을 보면 마리아가 말하기를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갔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마리아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고 그 문제는 예수님께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은 “해 주시겠다”, 또는 “안 해 주시겠다”하는 어떤 답변도 없었고, 어찌보면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답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렇게 하라고 하인들에게 명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결과를 주시든지 그대로 받으리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생각한 해결책을 가지고 올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님이 해결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그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포도주를 만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리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인들의 순종과 물로 된 포도주

 

주님은 돌 항아리 여섯에다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포도주를 사러 가는 것이 정상인데, 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하는 이상한 명령을 믿고 따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 물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로 된 포도주가 아니고 포도주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에 낮은 것을 내는데 이 잔치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믿음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부모의 죄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그 때 주님은 “누구의 죄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이적,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 내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너희에게 이루게 하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이적을 통해 영광을 받은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무슨 문제를 가지고 나가든지 그 문제의 해결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를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주일에 떡과 잔을 가지고 예식을 드릴 때, 빵을 보며 빵 만든 사람을 생각하고 밀가루가 어디서 수입되었는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찢기실 때의 아픔과 창으로 찔리실 때 나온 피를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볼 때에도 그의 학력이나 그가 구원받기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

 

가나의 혼인잔치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포도주 이적을 통해 드러난 것은 예수님이고 주님의 신성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먼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찾아가야 할 대상이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자신이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주님께 가져가고 그것이 마치 신령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사람을 찾아서 방황하면 안 됩니다.

 

또한, 문제를 가지고 찾아갔을 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받을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 그러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잡아온 계집종의 말을 듣고 자신의 병(문둥병)을 고치려 선지자에게 찾아갔을 때, 선지자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담그라고 지시하자 그는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생각한 치료 방법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해결책을 스스로 생각하고 나와선 안 됩니다. 그가 결국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자 몸이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를 가지고 오든지 주님께 나왔을 때에는 그분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제 해결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분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이고, 자녀양육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이며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어떤 이는 그렇다면 내 삶, 내 꿈, 내 행복을 모두 버려야 하냐고 한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가 아니었나요.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주님을 떠나 고통과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모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주님께 나아가기 바랍니다. 마리아와 같은 자세로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