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2010년 July 4일 ()

본문: 고린도전서4:6-16 |

주 제: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본 문: 고린도전서 4장 6-16절

 

설교자: 조 성 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가서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해서 그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또 어떤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성도들을 가르쳤고 그 이후에는 아볼로가 와서 그곳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가 씌어졌을 때 사도 바울이 들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은 참으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처음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도들이 얼마나 사도 바울을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받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 이런 슬픈 소식을 들으니 사도 바울의 마음이 참 아팠을 것입니다. 교회가 처음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발전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교회사를 보면 세월이 지날수록 교회가 진리를 떠나 세속화되고 자신을 높이기 위한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됩니다. 순수하고 사도 바울을 사랑하던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에는 성적 범죄와 소송과 파당 등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부자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말은 물질적인 부요함이 아니라 마음이 부자인 상태,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임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4:6)” 사도 바울은 성도 앞에서 아볼로를 두고 본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세 가지 결정 중 어떤 것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데, 바로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배우자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결정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인도해 갈 목자를 만나는 것이 참 중요한 결정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이후에 아볼로라는 훌륭한 일꾼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 받은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삶의 모델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특별한 전도자와 교사가 되어서 본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 목회자가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분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교회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삶의 본이 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참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친 이유는 말씀의 범위를 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떠한 삶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은 조금씩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도를 벗어난 고린도 그리스도인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4:7)”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다 못나고 미천한 자들이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잊은 채 마음이 교만해져서 서로를 구별한 것입니다. 교회는 돈이 많으냐 적으냐로, 많이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로, 사회적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로 서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것 중에 하나님께 받지 않는 것이 있나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 누구도 주님이 받은 자들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5)” 베드로가 비몽사몽 중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온갖 부정한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받아들이신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말하면 우리도 거룩하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받아들여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받은 사람을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4:8)” 사도 바울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비꼬듯이 한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심지어 사도 바울에 대해 하기를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고후 10:10)”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마음이 높아져 있고 세속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 지식, 평안함과 기쁨, 물질과 건강함 등은 모두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곤고한 영혼을 채울 수 없기에 많은 이들이 자살을 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의 복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비교할 것이 무엇입니까.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사람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 약한 면이 드러날수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능력, 사랑, 자비와 온유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전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어 그들을 주님께 인도한 영적인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이제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8-20)” 그들은 이제 사도 바울의 삶에서도 영적인 영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겹다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것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배부르고 이미 부요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잘 들여다보지 못한 증거입니다.

 

성도들을 위해 미련하게 된 바울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4:9-13)”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지혜롭고 강하며 부요한 자들이 되었고 사도 바울의 삶은 반대로 비참했습니다. 정처 없는 생활 가운데 사람들의 웃음거리였고 핍박받고 헐벗고 매 맞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사도 바울은 미련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혜롭고 많이 배웠으며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미련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구별하여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파당을 나누고 사도 바울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높아져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해져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 될까봐,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울까봐, 다른 성도들을 세우려고 정처 없이 핍박받고 고통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미련한 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미련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조금만 거짓말을 하고 조금만 서류를 고치면 더 잘 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있나요. 자동차도 주님께 받은 것이고 집도 주님께 받은 것이며, 지혜도 건강도 수명도 모두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것도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드러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서로 내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우리는 주님의 것이요 함께 하늘에 가게 될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