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의 감사

2010년 March 7일 ()

본문: 누가복음 17:11-19 |

주 제: 사마리아인의 감사

 

본 문: 누가복음 17장 11-19절

 

설교자: 조 성 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지금은 한센 병이라고 하는 문둥병은 당시에는 걸렸다고 하면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고, 날마다 손가락 발가락이 하나씩 사라지는 처참한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열 사람의 한센 병 환자를 만나셔서 그들을 고치신 후 그 중 한 사람이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했던 장면입니다.

 

사마리아의 한센 병자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당시 문둥병에 대한 진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레 13:2-3)” 제사장이 환자를 진단해서 ‘정하다’ 또는 ‘부정하다’ 판결을 했습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레 13:45)” 그들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멀리서 소리 질러 자신의 부정함을 밝혀야 했고 항상 진 밖에서 사람들과 격리된 채 살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환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와서 진찰을 받고 의식을 행한 다음 진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레 14:2-9). 그러나 이 병은 자연적으로 치유되기 매우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지역을 지나시다가 열 명의 한센 병 환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를 질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감사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들 모두는 나음을 입었고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주님은 병을 고치실 때 완전하게 고치십니다. 썩은 이를 금니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원래 치아로 바꾸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들은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주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 뜬 사람이 무심하게 여길 리 없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처음 받았을 때는 기뻐하고 찬양하고 밤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모두가 다 나음을 받았지만 낫게 해준 주님께 와서 엎드려 경배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그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사회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낫게 해준 주님께 찾아와서 감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기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나음 받은 아홉 명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나음을 받은 열 명의 한센 병 환자 중 한 사마리아인만이 감사를 표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들의 감사의 생활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다양한 비유를 들고 있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이야기, 새로운 남편과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 밭에 숨기운 보화를 발견한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3-27)”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빚져서 평생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이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탕감받은 그 순간 우리의 머릿속에는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가서 돈을 받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너도 그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옳지 않으냐고 말씀하십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장님으로 살았는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울고만 있겠습니까. 눈 뜬 것에 대해서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 감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새로운 남편을 만났다는 비유도 있습니다(롬 7:2-4). 못된 남편과 살다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그 감사를 몇 번이나 하고 중단해야 할까요. 아마 남은 삶 동안 늘 감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영원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기한 능력을 베풀고 그것으로 기뻐하여 주님께 말씀드렸더니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몇 주 예배에 참여하면서 생각한 것은 제가 예수님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계시면 참 민망하실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시간에 입을 열어 감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줄을 서서 감사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감사하면서 살 것입니다. 매일 매일 입을 벌려 주님께 감사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다 감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얀마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왕자와 공주들의 삶입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많아 늘 풍족하고 평안한데도 우리의 입에서는 감사가 날로 줄어듭니다.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앞에 두고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주님께 참 죄송스럽습니다.

 

결론

 

한나의 기도를 보면 감동이 됩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삼상 2:8)” 다윗의 고백을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많은 찬송시들을 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2-3)”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권고를 생각해 봅시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 51:1)”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저는 알콜 중독자가 되고 세상에 향락에 빠져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영원한 지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운명으로 살아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예배의 몇 가지 중 하나는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지만 교회 문만 나가면 삶이 엉망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롱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회사나 이웃들에게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삶을 통한 예배입니다. 두 번째는 물질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머니가 열리지 않는 예배는 참다운 예배가 아닙니다.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것이라”고 했던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세 번째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입술의 열매가 있어야 하고 예배당에 와서 떡과 잔을 놓고 예배드릴 때에도 입을 열어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는 것도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돌아와서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처처에 지진과 기근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구원의 때가 가까이 이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 남지 않는 이 때에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고 살 수 있도록 하신 것,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날마다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의무이고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 지 생각해보시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