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장막집

2005년 February 27일 ()

본문: 고린도후서 5:1-10 |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5장 1절 - 10절
주제 : 우리의 장막의 집
설교자: 조성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오늘 저는 우리의 장막집이란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다 이 말씀을 좋아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땅의 장막집

사도 바울이 장막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의 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넓은 아파트에, 혹은 좁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미얀마에 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좁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방 한칸에 부엌 한칸 밖에 없었습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거처에 불과 합니다. 사람이 살던 집을 떠나면 그가 살던 집과는 더 이상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을 보면 더러 집을 가지고 과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집이 높은 장소에 있다고 자랑하고 혹은 집이 예쁘다고 자랑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키가 좀 크다고, 얼굴이 잘 생겼다고 자랑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얼굴이 못생겼다고 고민합니다. 여기의 말씀은 우리가 살고있는 집은 우리가 건축한 집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거하는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 안에 살고 있는 영혼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이 몸을 떠나게 되면 하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집을 떠나게 될 때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좁은 집에서 살다가 넓은 집으로 이사갑니다. 우리도 이 몸에 살다가 이사를 갑니다.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집으로 이사를 갑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구원 받은 성도들은 탄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항상 즐거움만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은 탄식 가운데서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제한된 영역 안에서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육체의 고통, 정신적 고통을 인하여 탄식합니다. 어떤 분들은 정신적 고통으로 자살까지 합니다. 집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탄식가운데 살아 갑니다. 바울은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한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탄식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 마음속에 쉼이 없습니다. 갈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육체 가운데 살 때에 짐 진 것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로마서 8:22에서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 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몸의 해방을 기다리는데 이는 육체 가운데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세상이 죄악가운데 사는데 의롭게 사는 것은 고통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나 우리의 정욕이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주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싶으나 원수를 볼 때 그러지 못하고 분개함이 일어납니다. 그런 자신의 옛 성품을 인하여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원하는 데로 따라오지 아니합니다. 이런 것이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육체에서 해방 받을 날을 고대합니다. 저는 며칠 전 병원에 가서 한 연세 드신 노인이 입에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팔에는 주사가 꽂혀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 참 인생은 고통스럽고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육체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을 섬기는 섬김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보다도 주님을 섬김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늙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 합니다(고후4:16) 주룸살 제거 수술을 해도 늙는 것은 막지 못합니다.

하늘의 집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격스럽습니다. 우리의 몸은 정교하게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는데 세밀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혈관, 신장, 심장, 위장, 뇌, 등등 이런 모든 기관들을 친히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생명을 불어넣으시기 전에는 그냥 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비로소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살 집 곧 새로운 몸을 만들고 계십니다. 제가 살 집을 거의 다 만드셨을 지도 모릅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장막집을 떠나서 그곳으로 가면 그 집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영원의 세계에서 살 집 - 그집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합니다. 하늘의 집에 대해 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육체는 너무 제한 적이고 미약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셨는데 방어력이 없고 연약합니다. 조그만 바이러스에도 쓰러져 죽습니다. 강한 것 같으나 약합니다. 또한 우리가 교통 수단을 이용하기는 하나 극히 제한 적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받게될 새로운 몸은 전혀 다른 몸입니다. 개념 차체가 다릅니다. 지식, 영역, 운동성, 영광, 형체,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것입니다. 새로운 개념의 집입니다. 현재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그런 새로운 세계에서 살 몸입니다. 우리는 빛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거리에 상관없이 이동할 수 있으며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완전하고 전혀 부족함이 없고 질병과 사망이 상관없는 몸입니다.

.하늘의 집을 사모함

4절 말씀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 을 볼 수 있습니다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한 부류의 사람들은 단순히 벗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너무 귀찮고 고통스러워서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벗고자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새로운 몸으로 덧입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면 자유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어떤 연예인이 자살을 했는데 사람들은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정말 천국에 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살을 하면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떠나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진정한 자유를 잃게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먹고 여행하고 생각할 자유가 있습니다. 신앙을 가질 수 있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 갈 때 그러한 모든 자유는 끝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나라에 가고 싶느냐고 질문하면 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고통스러워 가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이 세상 삶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직장, 가정, 기타 여러 가지 삶이 힘들어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늘나라의 새로운 몸으로 덧입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4: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늘의 집에 대한 보증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씀을 듣고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하고 염려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한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제 마음이 감동됩니다. 우리는 돈을 빌릴 때 빌리는 사람이 보증을 세웁니다. 빌려주는 사람이 빌려준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보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꼭 갚도록 하기 위해 연대 보증을 서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새로운 몸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오히려 믿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성령으로 보증을 세우셨습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못 믿으시구나 생각하니 제 마음이 슬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영생을 주셨다고 약속을 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쳤습니다.(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런데도 안 믿고 보증을 더 세워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아담 이래로 사람들은 계속 불신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도 계속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에 갈 것과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에 대해 성령으로 보증하셨습니다. 또한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되며 새로운 몸을 입게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장막집 - 새로운 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교인과 대화하면서 하늘나라 있어도 이 세상만큼 아름답겠냐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증을 더 세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또한 자기이름으로 맹세하여 보증하셨으므로 더 이상 보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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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집에 대한 확신

6절에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지금 신도시에 아파트를 준비하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여러분의 전셋집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고 하면 겁이 납니까? 겁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집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전셋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염려 없이 떠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알지만 -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새로운 집이 있기 때문에 담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머지않아 생을 마치면 하늘나라의 새로운 집이 있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세상을 떠나가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나의 새로운 집은 어떤 집일까? 어떤 모양일까? 어떤 능력이 있을까? 지금은 천사보다 못하나 천사보다 나은 몸- 주님과 같은 몸을 입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어디든 있을 수 있으며 먹을 수 있고 안 먹어 됩니다. 우리의 생활 영역은 온 우주입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바울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7절)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이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여호수아가 물이 둑에 넘치는 요단강 가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요단강으로 들어갔을 때 물이 쌓이고 강이 마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리고 성(城)을 하루 한 번씩 6일간 7일째는 7번 돌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이 무너진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치로도 이해 될 수 없습니다. 성은 크고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니 성은 무너졌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신뢰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고기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주님께 우리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의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내렸을 때 셀 수 없는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사고로는 황당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그들은 나에게 나는 네 다리를 잡고 올라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광 가운데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 했습니다. 지금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더 있다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

또한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 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의 중심은 이 땅에 있든지 천국에 가든지 어디 있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이 그러해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보험을 들어서 늙어도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천국보험은 어떤가요? 천국에는 영원한 안식처와 영원한 몸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만 가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이후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 가운데 있을 때에 탄식합니다. 우리의 환경. 육체의 연약함, 인간관계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괴로움등 이모든 탄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면 심판은 없고 상급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급만 조금 적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가볍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가지 않지만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에 따라 산 사람들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 육체를 떠나갈 날이 가까워 오고있습니다. 조금 전에 특송한 우리 젊은이들은 더 오래 살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행복 할 까요? 먼저 천국에 간 사람들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집에서 더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진실로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는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힘씁시다. 우리는 지금 썩을 장막 집에 살고 있지만 현재의 고통은 머지 않아 끝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9,10) 여러분의 모든 삶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살 새로운 집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약속을 위해서 성령으로 보증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셨습니다. 머지않아 그곳에 갈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고 주님을 위해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