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산 길

2005년 March 6일 ()

본문: 히브리서 10:19-25 |

본문말씀: 히브리서 10장 19-25절
주제 : 새롭고 산 길
설교자: 조성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새롭고 산 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있다고 하면 가롯 유다처럼 거의 3년 반 넘는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모든 역사를 맛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도 보고, 날마다 영생의 말씀이 전파되어지는 것을 친히 듣고도 결국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힌 두 강도도 한 강도는 영생을 얻고 하 강도는 영원한 멸망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앞서 더 먼저 이해할 것은 지금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주님의 이적과 그 모든 것을 친히 목격하고 즉, 성령의 역사를 맛보고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도 주님께 나오지 않는 자들에게 이 본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권고를 거절한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께 나오지 아니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26절부터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
그럼 오늘은 25절까지만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 길은 바로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형제들이다 하는 말은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칭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 여러 곳에서 사도들은 유대인들을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북한의 문화가 동무의 문화이듯 이스라엘의 문화는 형제 문화인 것입니다. 22절에서 볼 때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합니다. 왜냐면 양심이 우리를 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이들은 양심이 마비 됐기 때문에 자신은 양심에 꺼리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사람이 남의 집 과일을 따먹을 때 주위를 살핍니까? 나쁜짓을 할 때 얼굴은 왜 빨개질 까요? 그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존 전에 나아갈 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우리가 떳떳치 못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은 양심으로 인해 고민하고 죄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제가 태국에 갔을 때 밤하늘에 많은 불들이 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그 안에 각자가 자신들의 죄지은 것을 적어 실은 수많은 열기구들이었습니다 . 그들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런다고 죄가 없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마다 보면 자기의 죄를 없애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재물로 드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신의 마음을 달래봅니다. 곡식과 재물, 짐승을 바치고 혹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써보는 것은 죄악으로 인한 양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들의 노력입니다.

새롭고 산 길이신 예수님
주님께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지성소와 성소 사이는 두꺼운 휘장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 외에는 길이 없다.' 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때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지르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막혀있던 길이 열림을 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열어두신 그 길을 통해 그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롭고 산 길은 전에는 없던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짐승의 제사는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상징적인 것에 불과 한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 성소에 들어갈 때 옷에는 방울이 달려 있어 밖에서 들을 때 방울 소리가 나면 그가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하셨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일년에 대제사장이 한 번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도 대단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한 사람만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휘장이 열리고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은 새롭고 산 길입니다.
이 생명에 들어가는 길에 우리는 몇가지 생각을 해야합니다. 진정한 구원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으며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위해선 그들의 죄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병든 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구세주는 죄인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말씀에서처럼 '우리가 양심의 죄악을 깨닫는다' 하는 것은 구원의 첫걸음 인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교회는 나오고 있으나 여전히 구원에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데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선 죄인이 아닐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선 죄인인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자연 재해가 있을 때는 하늘의 무심함을 호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풍년이 들면 조상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죄인이 아닙니까? 자기의 죄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를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가깝게 나왔다가 가롯 유다와 같이 영원한 멸망 길로 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정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구세주가 그들에게서 나왔으며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에게는 수많은 약속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이 모든 것들을 배척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답답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보고 죄인이라고 말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첫째 조건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자신을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잠 못이루는 사람은 구원받기 쉽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구세주가 계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말씀에 보면 그가 새롭고 산길이데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은 곧 예수님입니다. 다른 사람을 믿어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로지 예수그리스도 의 길뿐입니다. 그는 새롭고 산 길입니다. 그의 육체라고 했는데 그 육체는 바로 십자가에서 달려 찢기고 피 흘리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는 길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이나 이상, 이적, 기도중의 뜨거운 마음, 혹은 기도중의 음성 등을 자신의 구원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모든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만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 중에 병이 나섰음을 이유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아니하였나까 주의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지 않았습니까 하였을 때 주님께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적, 환상, 체험, 교회출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에 많은 잘못된 것들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보다는 육체적인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더 복을 받아 잘 살까 하는 것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
22절 하반절의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에 대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 순수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사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가 신뢰할 때 그분의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마음과 순수한 마음, 온전한 신뢰라는 믿음에 대한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음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바른 근거입니다. '말씀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우리는 여기서 온전한 믿음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구원받은 근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갖은 구원의 확신만이 진정한 것입니다. 확실한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으셨습니까? 하는 질문에 과거에 느꼈던 감정들을 들추어냅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과 성령으로 이를 보증하십니다.
마지막으론 구원에 대한 합당한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없다면 앞의 모든 것이 거짓이 되어집니다. '서로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자' 이것이야말로 열매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9~11절에서 선행이 사람을 구원시킬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에는 꼭 그 열매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고백하고 있지만 삶은 여전히 변화되고 있지 못합니다. 단순히 지식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형제간에 늘 싸우다가도 한 명이 다른 사람과 싸우면, 원래 잘 싸우던 형제가 같은 편이 됩니다. 그만큼 피로 이루어진 관계는 특별하고 친밀한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은 바로 이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미워하는 형제라도 누군가가 그 형제를 욕하면 기분이 나빠지며.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은 삶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로 말하고 있으며,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풍족히 살면서 굶주리는 형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형제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만 잘먹고 잘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구원이 없으며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에는 열매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그 길만이 새롭고 산 길입니다. 자기 죄를 인식했을 때 그것을 그리스도께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살아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에 대한 합당한 열매가 있는가 자신의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26절에는 무서운 경고가 있습니다. . '살아있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구원은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기회가 주워졌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열려져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때가 낮이매 빛이 있을 때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밤이 되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의지하고 있는가? 믿음의 진정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살펴봐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끝까지 예수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간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신앙의 기본은 모이는 것에 힘쓰는 것입니다. 모임에 소홀히 하며 좋은 신앙을 지키기란 힘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굳게 서 있기 위해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과 같이 해선 안될 것이며 더욱 모이기에 힘쓰십시다. 여러분이 아직 믿지 않으신 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미암아 영원한 산 길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모든 죄의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새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는 자들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인가를 돌아보고, 모이기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