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두 약속

2010년 September 26일

본문: 갈라디아서 3:15-22 |

주 제 : 하나님의 두 약속.

 

본 문 : 갈 3:15-22

 

설교자 : 조 성 훈

 

3:15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3: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3:20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3: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3: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세운 두 약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도 약속을 한 것을 쉽게 파기하거나 어기지 않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약속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과의 약속도 그것이 성립되었을 때는 쉽게 파기하기하거나 변경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보험을 들거나 카드를 만들 때 지켜야 될 조약을 명시해놓은 약관을 보곤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혜택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은 조건적인 것과 무조건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건적인 언약을 의지했고 이방인인 우리들은 무조건적인 언약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 결과가 다르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은 매우 많습니다. 구약에서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보호의 약속,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고, 신약에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보호에 대한 약속, 다시 오심과 하늘의 기업에 대한 약속 등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수많은 약속을 모두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약속은 잘 지키지 않아서 문서 등으로 그 기록을 남겨두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지 못해서, 또는 고의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히 6:17-18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분이셔서 모든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들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어떤 약속은 조건이 있고 또 어떤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각의 약속의 조건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정확하게, 또한 자세하게 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복수(자손들)가 아니라 단수(자손)로 말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아닌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 17:1~7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 주고 너를 번성케 하며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이었기에 아브라함이 해야 될 이유는 없었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러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언약을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세우신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신 뒤 율법을 받기까지는 약 645년이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430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셨는데 그 이후부터 율법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두 가지(무조건적, 조건적) 언약을 이스라엘에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언약과 관련이 있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해답을 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즉,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은혜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은 그가 어떤 행위를 해서 주어진 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언약인데 구원이 바로 이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낳은 후손(단수)을 통해 축복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참으로 감사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기에 우리가 거져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를 대조하면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아브라함의 언약은 자유하는 여자(사라)에게서 난 이삭에 비유하고 율법은 종(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에 비유합니다.

율법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19절부터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절)”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이스라엘에게 베풀기 위해서 두 번째로 주신 것이 율법인데, 이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만일 제가 물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물에서 구원해주겠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저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누군가 저에게 와서 “이 약을 먹으면 암이 다 낫게 됩니다.” 라고 말한다 해도 저는 별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암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에게 의인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을 율법을 통해 죄 아래 가둔 것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함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고 안간 힘을 썼습니다.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율법의 원래 목적과 달리 그들은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눅 22:20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손을 통해서 축복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은 행위에 근거한 즉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근거한 언약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게 된 구원, 하늘의 소망과 기업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언약에 근거해서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나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구원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은혜에 근거합니까? 아니면 율법에 근거합니까? 만일 여러분이 받은 영원한 구원에 어떠한 조건이 붙어 있다면 그것은 율법에 근거한 구원입니다. 선하게 살아야 되고 구제도 많이 해야 되며 주일 성수를 꼭 해야지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율법에 근거한 구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율법에 근거해서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을 율법에 비추어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따라가다가 결국 죄인임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그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구원받은 사람이 적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아주, 아주 적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고작 8명이었습니다. 노아 방주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죽고, 지금은 6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정말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지만 더더욱 불행한 것은 그들은 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좋아한다면서 더러운 물을 먹기도 하고 15년 동안 벽만 보고 수행하면서까지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행위로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율법에 근거한 구원을 바라는 행위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구원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 종종 저에게 선물을 주시곤 하는데 제가 그 때마다 미안해서 얼마씩 돈을 드린다면 성도님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선물은 감사함으로 받을 때 가장 좋은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을 축복하시겠다는, 조건이 없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또 하나는 시내산의 율법에 기초한 언약, 즉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의 약속을 붙잡았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려고 주신 율법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사실만 드러나고 하나님의 의에는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의지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이 은혜의 언약을 붙잡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고 복을 누리며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갈라디아서를 통해 율법을 지켜서 하늘나라에 갈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은혜의 때인 지금 은혜의 언약을 붙잡은 것이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구원을 통해 나타나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