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때에 숨으시는 하나님

2007년 September 23일 ()

본문: 시편 10:1-18 |

주 제: 환난 때에 숨으시는 하나님

 

본 문: 시 10:1-18

 

설교자: 조 성 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않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손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숨으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못 본 체 하신다는 생각을 하기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바쁘셔서 사람들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너무 멀리 사시기 때문에 사람의 생활을 못 본 척하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의 항의

 

사람은 그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어려울 때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원망할 때 “하나님도 무심하시지”라고 하며 하나님을 언급하곤 합니다.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간의 양심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화와 복, 삶의 모든 여건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져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각각 느끼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사람들은 다 다르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평생 잊지 못합니다. 만약 내가 어려울 때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못 본 체 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환란 중에 숨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시편의 다른 말씀들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는 참으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지금 세상의 많은 죄악을 보시고 왜 잠잠히 계시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사업도 잘 되고 건강하고 일이 잘 풀리는데 어째서 그러하냐고 생각하는 우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서 계시거나 관심이 없으시거나 사람을 못 본 체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항의의 이유

 

시편 기자가 항의하는 이유는 악인들의 행위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욕을 자랑하고 악한 자를 칭찬하며 악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잊어버렸다고 하고 그 얼굴을 가리워 보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요통치 않을 것이며 대대로 환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은 자들을 왜 벌하지 않으시느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요구

 

때로 우리는 시편 말씀을 보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말씀에서 악한 자들에 대한 저주를 종종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그들의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들의 팔을 꺾으소서”, “그들의 죄를 끝까지 찾아 벌하소서”라는 말씀은 죄인들에 대하여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깨어서 행동하라고(손을 드소서), 어려움 당하는 자들을 잊지 말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업 상의 문제, 가족의 문제, 자신의 문제 등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가리켜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과 환란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때 잠잠히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돕지 않으시고 숨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본문 말씀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분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아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분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으며,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였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아갈 수가 있었으며 믿음으로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사로 드릴 수 있었고 믿음으로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할 수 있었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아들들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셉도 모세도 라합도 모두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어려움을 모르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배우고 압니다. 전능하시다는 말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움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따라 환란을 당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기도 하면서 모두 믿음을 따라 승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는 이유

 

왜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실까요. 주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주님께 알렸을 때 주님은 당장 오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이틀을 더 계시며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나사로의 가족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역시 어려움을 당할 때 못 본 체 하시는 것 같은 주님을 향해 마음이 상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았을 때, 완전히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은 더 큰 영광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경우에는 주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지만, 때때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된 일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아마도 이 땅을 잊어버리고 기쁘게 살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망하는 것이 아니고 축하할 일이고 축복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고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잠잠히 계시는 이유는 분명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세 번 기도했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12:7-9). 이 말은 현재가 그에게 가장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각각 천 억씩 주고 세상에 나가서 살게 하고, 10년 후에 그들을 다시 만난다면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신앙이 성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살게 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이와 같은 환경에 두시는 이유는 현재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환경인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을 키우려면 그것이 살 집부터 마련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환경을 마련치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아직 때가 아니거나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기도했던 기도 목록 중에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많습니다. 당시에는 필요하고 중요해 보여도 생각해보면 그것을 안 들어주신 것이 다행인 것들이 많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떠남으로 자처한 경우가 있습니다. 잠언 19장 3절을 보면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뿌리고 그 결과로 좋지 않은 열매를 맺고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악한 행실을 바로 심판하시지 않으시는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할 날을 작정해 두셨습니다(행17:31). 그날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모든 진노를 그날에 쏟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에 숨으시거나 못 본 체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욥과 같이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시험하시고, 신앙적으로 자라가게 하기 위해 환경을 허락하시며, 교훈의 목적을 위해서나 합당한 때를 기다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든 죄를 알고 계시고 각각 그 행한 대로 받으리라고 경고하고 계시며 심판 날 모든 것을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탄식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경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환경 가운데 우리를 두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축복하시길 원하시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신뢰한다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합당한 때에 그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